파리의 안나 137
일찍 잤는데 아침에 너무 피곤했다. 웬일인지 간호사가 일찍 와서 여덟 시 반에 강제 기상했다. 임무 수행 도중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 저저번달 생리통이 떠올라 의자에 앉아 버렸다. 물을 갈아 주고 방으로 가기 위해 걷는데 앞이 안 보였다. 급히 침대에 가 누웠더니 이명이 들렸다. 식은땀이 나고 힘들었지만 조금 안정을 찾은 뒤 다시 할머니 방으로 갔다. 할머니를 의자에 옮기고 대충 정리를 한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일어나기가 싫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 오니 아홉 시 반. 열 시까지 알람을 맞춰놓고 잠시 눈을 붙였다. 피곤했지만 알바를 위해 열 시에 일어나 씻었다. 대충 피부 화장만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것도 안 먹고 가면 더 기운이 없을 것 같아서 바나나 한 개와 커피 우유를 마시고 나갔다.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식당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는데 큰 이모가 바쁘신지 밖을 내다보지 않으셔서 꽤 오래 밖에 서 있었다. 나중에 나를 발견하고 나오는 큰 이모께 인사드리고 식당에 들어가니 노래를 듣고 계셨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고 하셔서 빈혈에 대해 말씀드리니 햇볕을 쐐야 한다고 하셨다. 늘 그렇듯 청소를 하고 반찬 세팅을 마친 뒤 예약 손님 자리를 정돈했다. 연휴 다음 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혼자 오는 손님도 있었고, 5명, 6명, 그룹 손님도 있었다.
맨 처음 들어온 여자 손님이 연근 조림을 보고 뭐냐고 묻기에 이모가 알려주신 대로 ‘lotus’라고 알려주니 그건 꽃이란다. 그래, 연꽃의 뿌리니까. 근데 ‘뿌리’가 불어로 뭔지 몰라서 마임으로 열심히 설명했는데 전혀 말이 안 통했다. 그냥 안 먹으면 되지 끝까지 뭐냐고 묻기에 5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느려터진 내 폰을 켜 ‘연근’을 검색했다. ‘rhizome’을 써서 보여주자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엇으로 양념을 했냐고 물었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궁금한 거지? 결국 간장까지 검색해서 알려주고는 친절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나마 손님이 적을 때 물어봐서 다행이지, 바빴더라면 온갖 짜증이 다 낫을 거다. 어쨌든 수월하게 일을 끝냈다.
이모들이 산책 좀 하고 들어가라고 하셔서 못 이기는 척 몽파르나스 타워까지 걸어갔다. 날씨가 춥지 않아 좋았다. 얼른 햇볕을 쐬고 싶어서 집에 들러 간단히 가방을 챙겨 퀵 보드를 끌고 나왔다. 집 앞 빵집에서 바게트를 하나 샀는데 봉투에 넣어주질 않아서 그대로 가방에 넣어 버렸다. 오랜만에 퀵 보드를 타니 재미있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졌다. 튈르리 정원까지 가는 길에 배가 고파 바게트를 조금 뜯어먹고(남은 것은 그냥 겉 옷 주머니에 넣었다.) 카지노에 가서 딸기맛 우유를 샀다. 사이즈가 다 큰 것 밖에 없어서 제일 싼 카지노 상품으로 골랐다. 공원에 도착해 의자에 앉아 햇볕을 만끽하다 우유 맛을 보려고 꺼냈는데 이상하게 요구르트 맛이 났다. 외국 우유라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요거트였다. 밀키라고 쓰여 있기에 당연히 우유인 줄 알았는데, 별로 맛도 없었다. 4시가 넘어가니 해가 금방 져서 살짝 추워졌다. 돌아갈 땐 지하철을 탈까 조금 고민했지만 그냥 퀵 보드를 끌고 걸어갔다.
집에 도착해 오후 임무 수행을 마치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워홀 공모전 결과를 확인했다. 내 이름은 없었다.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했다. 내년에 재도전해야지. 유랑 카페에서 저가 항공을 검색하다 빨리 예매할수록 싸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이지젯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내년 2월 22일 날짜로 검색해보니 다음 날인 23일이 조금 더 저렴했다. 12시 40분 비행기가 딱 좋다고 생각했는데 3자리밖에 안 남았다고 뜨기에 급하게 회원 가입을 하고 예매를 했다. 규한이와 나, 어른 두 명에 수화물 각 20kg씩 추가하여 137.66유로다.
외국 사이트는 카드 결제 시에 공인 인증서나 다른 인증 방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카드번호와 유효기간, 카드 뒤의 3자리 숫자만 입력하면 끝이다. 도용당하면 큰일 난다. 내 통장에 들어 있는 600만 원이 어떤 돈인데. 잘 간수해야지. 어쨌든 비행기 예약을 완료했으므로 23일 점심에 이탈리아 로마로 간다! 이제 슬슬 계획을 구체화시켜야지. 설렌다. 재밌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