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38
어제 일찍 자서 엄청 피곤하진 않았다. 눈 뜨자마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해결한 뒤 할머니 아침을 챙겨 드렸다. 양치까지 시켜드린 뒤 씻고 피부화장을 했다. 눈 화장은 귀찮으니까 패스. 어제 산 딱딱한 바게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인터넷 서핑을 했다. 오늘은 수능이다. 내가 일어난 시간엔 이미 모든 시험이 끝난 뒤였다. 4년 전, 아니 벌써 4년이나 흘렀단 말인가? 어쨌든 그땐 정말 힘들고 괴로웠는데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뚜왈렛이 10시 반에 왔다. 게다가 그 말 많고 고집 센 아줌마였다. 나는 알바 하러 가야 해서 45분에 집에서 나왔다. 오늘도 날씨가 좋다. 어제보단 활기차게 일을 했다. 그런데 15명, 7명 예약 손님이 생기는 바람에 식당 오픈도 전에 멘붕이 왔다. 작은 이모께서 주문은 본인이 받겠으니 물을 사 오라고 하셨다. 까르푸에 가서 에비앙 1.5리터짜리 한 묶음을 사려는데 1리터짜리 밖에 없었다. 결국 고민하다 크리스티앙 한 묶음을 사들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새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서빙을 시작했다. 땀이 뻘뻘 흘렀다. 혼자 온 할아버지 손님에게 메뉴판도 안 주고 전채 요리를 내갔다. 그때부터 계속 그 할아버지 식사만 늦게 나와서 나까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크게 노여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식사를 다 한 분께는 죄송하지만 계산하고 나가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2시쯤 되니 역시나 모든 손님들이 쫙 빠졌다. 식탁 위는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열심히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손님이 또 들어왔다. 3명의 여자였는데 한 명은 바쁜 일이 있는지 그냥 가고, 2명이 돌솥 비빔밥을 시켰다. 설거지 소리와 식탁 정리 소리밖에 안 나는 고요한 식당에서 그 둘은 신나게 수다를 떨며 접시를 싹 비웠다. 힘든 시간이 지나고 핸들링을 하며 밥을 먹었다. 제육볶음과 김치였는데 맛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크게 실수한 것도 없는데 작은 이모가 너무 잔소리를 해대서 짜증 났다. 제일 정신없는 건 본인이면서 온갖 짜증을 나한테 다 낸다. 아마 그냥 본인 성격이 급해서 순간적으로 욱하는 것 같은데 좀 고쳤으면 좋겠다. 저번에 작은 이모 안 나오고 큰 이모랑 둘이 한 날도 바빴지만 훨씬 안정적이었다. 계속되는 잔소리에 나도 욱해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요”라고 대들기까지 했다. 정신없는 상황이라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어쨌든 모든 일을 끝내고 나오니 2시 56분. 아무리 바빠도 3시는 안 넘긴다. 집에 도착해 어제 사 온 딸기 요거트를 마시며 컴퓨터를 했다. 친구랑 대화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서 외출은 안 했다. 집에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어. 서핑을 좀 하다가 여행 계획을 세웠다. 로마 일정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달력을 보며 날짜를 계산해보니 규한이와 함께할 수 있는 건 고작 12일이었다. 그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벨기에를 다 갈 수 있을까? 막막하다. 어쨌든 로마 일정은 2박으로 마무리 지었다.
사실 다른 나라에는 뭐가 유명한 지도 잘 모르고 보고 싶은 것도 별로 없어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마 무리일 것 같다. 이태리 4박, 스위스 4박, 독일 3박, 벨기에 1박이 될 것 같다. 사실 벨기에는 규한이가 프랑스에, 내가 영국에 쉽게 가기 위해 들르는 정도라 제외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을 조금 느슨하게 짜서 나중에 못 간 도시를 보러 또 유럽에 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런데 나 혼자 영국에 갔다가 프랑스 지방을 돌 만큼 예산이 될지 모르겠다. 더 열심히 바짝 벌고 있는 돈은 왕창 아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