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46
쉰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간호조무사가 와 있어서 바로 임무 수행을 마쳤다. 늦은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뒤 조금 잉여롭게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 후 할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했다. 유로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 전 할아버지 치아 사진을 받으러 치과에 갔다. 가는 길에 김미숙 원장님이 새로 일 하시는 미용실에 잠깐 들려 커피를 얻어 마셨다. 프랑스 치과 냄새도 한국이랑 똑같았다. 치과 싫다.
사진을 받고 유로마트까지 걸어갔다. 한 3주 만에 간 것 같다. 간단히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갑자기 어떤 역에서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 탔다. 순간 교통카드 검사를 하는가 싶어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오늘은 할머니의 나비고를 빌려 왔기 때문이었다. 경직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다행히 그 누구에게도 교통 카드 검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리기 직전까지 내 심장은 평소보다 두 배로 빠르게 뛰었다. 집에 들어가며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근무가 끝나서 본부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찰은 교통 카드 검사를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어쨌든 집에 도착해 좀 쉬다가 할아버지가 또 부르셔서 나갔다. 큰 이모가 도미 매운탕을 끓여주신다고 오후 5시 반쯤 재료를 들고 오라고 하셨는데, 성격 급한 할아버지가 3시도 채 안 된 시간에 얼른 가자고 재촉하셨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어차피 가야 할 거, 재료를 들고 먼저 식당으로 갔다. 다행히 영업은 끝나고 다 정리된 상태였다. 큰 이모는 재료를 받아 들더니 5분도 채 안 돼서 뚝딱 탕을 만드셨다. 그대로 끓이다가 두부를 넣고 소금간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냄비를 들고 집으로 갔다. 조금 몸이 피곤해서 더 이상의 외출은 삼가기로 했다.
규한이와 함께 할 유럽 여행 계획을 다듬어 나갔다. 대략 루트를 수정하고 예산을 짰다. 규한이가 귀국 날짜를 미룰 수 있게 된다면, 총 16박 17일은 규한이와 함께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벨기에를 돌 거다. 그리고 나 혼자 2주 동안 영국과 프랑스 지방, 혹은 다른 나라를 갈 예정이다. 아직 찾아야 할 정보도 많고 정리할 내용도 많지만 벌써부터 설렌다. 우선 목표는 돈을 최대한 아끼고, 버는 거다. 다음 달 초까지는 대략적인 계획을 완성시켜 아빠에게 보내드려야 한다.
규한이는 유레일패스 글로벌 15일 권을, 나는 인터레일패스 한 달권을 사달라고 할 예정이다. 사실 패스 없이 구간 권으로 여행하는 것이 더 저렴할 것 같지만 예약에 대한 압박도 있고, 아빠가 사주신 다는 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시간 참 잘 간다. 곧 다가 올 연말과 새해가 외로울 것 같아 걱정이다. 타지에서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그리고 1월 1일이라니. 23살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