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48
알람을 꺼놔서 늦게 일어났다. 새벽에 잠깐 깬 것 같은데 그게 꿈인지 생신지 기억이 안 난다. 다행히 간호조무사가 늦게 와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임무 수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성당에서 식사를 하고 오신다고 하여 혼자 카레를 먹었다. 배를 채우고 준비한 뒤 미화 언니를 만나러 갔다. 어제 충동적으로 연락을 해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날씨 좋을 때 영상을 최대한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다.
2시에 개선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한시 반쯤 집을 나섰다. 날씨가 많이 포근했다. 개선문에 도착하니 1시 50분. 갑자기 쓰리지가 안 터져서 연락이 안 됐다. 혹시나 싶어 영화관 앞에서도 기다려보았지만 언니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휴대폰을 껐다 켠 뒤 벤치에 앉아 연락을 했다. 그런데 2시가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났지만 내 부탁으로 만나게 된 상황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영화가 2시 10분쯤 끝났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십분 뒤 언니를 만나 간단히 오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바로 개선문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언니가 삼각대의 고정하는 부품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냥 hands held로 찍어야 했다. 다행히 촬영 본을 확인해 보니 디카 상으론 큰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걸음걸이가 촬영을 의식해서인지 매우 어색한 건 확실했다.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자라가 보이게 한 컷, 모노프리가 보이게 한 컷을 찍고 막셰 드 노엘을 지나 콩코르드 광장까지 걸었다. 일요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마치 일요일의 명동 같았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튈르리 정원에서 두 컷을 찍은 뒤 루브르로 넘어갔다. 피라미드가 보이게 한 컷을 찍고 예술의 다리에서 한 컷, 퐁네프에서 한 컷 찍었다. 총 오늘 촬영 본은 8컷이다. 꽤 많이 좋은 구도에서 찍어서 뿌듯하다. 언니에게 고마워서 뭐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사실 돈이 없었다.
언니가 퐁마리 근처에 좋은 카페를 안다고 해서 따라갔다. 나는 오늘의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가 짰다. 감당하기 힘든 맛이었다. 언니가 사준다고 했지만 내가 사주지는 못할망정 얻어먹기가 미안하여 그냥 돈을 지불했다. 3.00유로. 짠 커피치고 비쌌다. 카페 분위기는 좋았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어 향긋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5시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고 혹시나 해서 할아버지께 연락하니 이미 뚜왈렛은 끝난 상태라고 하셨다. 죄송하지만 기왕 늦은 거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노트르담을 지나 생 미셸 먹자골목에서 식당을 탐방하던 중 언니가 피자가 맛있어 보인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피자집에 들어갔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 피자 한 판과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로제와 화이트와인을 시켰다. 잔에 담아 주는 것이 아닌 작은 병에 담아주는 식이라 언니와 조금씩 나눠 마셨다. 나는 화이트 와인보다는 로제가 더 맛있었다.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매우 싱거웠고, 피자는 매우 짰기 때문에 둘의 궁합이 잘 맞았다. 한참을 먹고 마시고 수다 떨다 보니 밤이 깊었다. 한 새벽 한시쯤은 되어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시계를 보니 8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남은 와인은 섞어 마셨다. 역시 술은 섞어야 제 맛. 배불리 음식들을 해치우고 한 사람당 15유로씩 냈다. 무난한 가격에 무난한 맛이었다.
서버 아저씨가 친절해서 기분이 좋았다.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묻기에 한국인이라고 하니 어설픈 ‘감사합니다.’를 말했다. 안녕하세요, 잘 가도 알려주니 ‘잘 가~’하고 인사했다. 언니완 생 미셸 역에서 헤어져서 집으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퀭했다. 오늘따라 더 못생겨 보였다. 게다가 왜 이렇게 졸린지. 와인의 힘인가? 집에 도착해 세수를 했는데 뚜왈렛이 왔다. 저녁 임무 수행은 무사히 마치고 샤워를 했다. 이제 얼른 자야겠다. 벌써 주말이 끝이라니! 내일부턴 다시 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