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보단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파리의 안나 08-1

by Anna

날이 또 흐리다. 아침 일찍 열리는 벼룩시장 구경을 가기 위해서 다른 날 보다 이른 기상을 했다. 오늘 내 복장은 청바지에 잠옷으로 입으려고 가져온 반팔 티셔츠, 서류와 예약금이 들어있는 자물쇠 걸린 백팩이다. 누가 봐도 배낭여행 온 가난한 학생 룩.


파리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라는 생투앙(Saint-Ouen flea market)에 가기 위해 환승해서 4호선 마지막 역인 ‘Porte de clignancourt’로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벼룩시장이 어느 쪽인지 몰라서 그냥 사람 많은 곳으로 걸어갔다. 벼룩시장이라기 보단 그냥 가판대가 많은 곳을 발견하고 구경하는데, 상인들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대부분 “你好” 하거나 “こんにちは” 했다.


다리 밑으로 쭉 걸어가니 옷 가게들이 즐비했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슬슬 벼룩시장의 냄새가 났다. 골동품이 가득 찬 창고 같은 곳을 들어갔는데 내가 사고 싶어 했던 퀵 보드가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자도 달려 있었다. 얼마냐고 묻고 싶었지만 조금 비싸 보였고, 지금 사봤자 또 짐만 늘리는 꼴이 되므로 참았다.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다리 밑 핫 플레이스도 보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생투앙은 동묘시장 같은 느낌이었다. 정착을 하게 되면 꼭 벼룩시장에서 퀵 보드를 살 거다. 구경을 끝내고 배가 고파 역 근처에 있는 빵집에 갔다. 크로와상 하나를 샀는데 1.10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에 촉촉하고 커다란 크로와상을 받을 수 있었다. 맛도 아주 훌륭! 한국에서 먹었던 크로와상은 진정한 크로와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언니는 루브르에, 나는 단기 집이 있는 ‘Les goblins’ 역에 갔다. 1시 2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도착한 시간은 약 12시 40분. 구글 맵으로 캡처해 둔 지도를 보며 집을 찾아가는데, 지나가던 노숙자가 의자를 휘두르며 시비를 걸었다. 무시하고 쭉 걸어서 집을 발견했다.


집 건물 1층에는 (프랑스식 0층) 빵집과 레스토랑이 있었고 건너편엔 프랑프리가 자리하고 바로 앞엔 버스 정류장이 있는 아주 좋은 위치의 집이었다. 약 40분가량 기다려야 해서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집주인이 일이 생겨 약속시간을 바꾸거나 날짜를 바꿨는데 내가 모르고 온 것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상상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시가 되었고, 나는 정류장에서 벗어나 집 앞 주차장 부근에 앉아 있었다.


1시 20분 정각.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 내 상상이 맞는 건가? 싶어 고민을 거듭하다 데이터 로밍을 켰다. 하루 9천 원. 그래 이 정도는 집 구하는 데 충분히 투자할 만하지, 라는 생각으로 네이버를 누르고 메일함을 확인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한국인 여자가 나왔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자 인사를 건네며 집 들어가는 방법을 안내해주셨다. 2중 digicode에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다만 2명만 타도 꽉 차는 비좁은 사이즈라는 게 함정. 내가 살 곳은 프랑스식 6층으로 5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나중에 짐 끌고 오려면 조금 고생이겠다 싶었다. 미로 같은 좁은 복도를 지나 맨 끝에 위치한 집 문 앞에 섰다. 중개 언니는 집주인의 친구라고 했고, 현재 비어 있은 지 꽤 된 곳이라 청소되어 있어 깨끗하고, 혼자 살기 딱 좋다고 말했다. 복도에 화장실도 하나 더 있었다.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방식이고, 딱 변기 하나 있는 작은 화장실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뫼블레 된 침대 하나와 책상, 작은 옷장, 싱크대,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다. 침대 밑은 소파로 쓸 수 있었고, 좁긴 했지만 냉장고도 있고 정말 혼자 지내기 딱 좋은 곳이었다. 여러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고, 사진을 몇 장 찍고, 서로의 여권 사본을 교환한 뒤 간단한 거주 예약 증명서까지 작성했다. 그리고 예약금 100유로를 현금으로 드렸다.


언니는 7년 정도 파리에 살았고, 현재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고 했다. 그녀의 정착된 삶이 부러웠다. 조금은 어리벙벙하게 나의 첫 집 계약을 끝냈고, 13일 오후 1시 20분에 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아까보단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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