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운이 좋은 하루다

피리의 안나 08-2

by Anna

4시 약속을 위해 12호선을 타고 ‘Pasteur’ 역에 왔다. 6호선을 타면 바로 ‘Trocadero’ 역에 갈 수 있어 좋았지만 8월 말까지 공사 때문에 탈 수가 없어 아쉬웠다. 역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건너편 신문 가판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누구일까. 메일로만 약속을 잡은 상태였고, 남자라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더 컸다. 우선 1시간 30분이나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역 앞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여긴 2.20유로다. 에펠탑 앞보다 훨씬 싸다. 커피를 홀짝이며 일상 메모를 했고, 데이터 로밍을 켠 김에 9천 원이 아깝지 않게 팍팍 쓰자는 심정으로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친구 미래랑도 오랜만에 카톡을 주고받으며 내 파리 생활에 대해 전했다.

한 40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점원이 오더니 돈을 지불하라고 했다. 커피 다 마셨다고 쫓아내는 건가, 싶어서 얼른 돈을 내고 참았던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갔는데 매우 열약했다. 약속 시간까지 한참이 남아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3시 50분까지 지하철 의자에 앉아 쉬다가 약속 장소로 나갔다. 혹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면 그냥 도망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멀리서 쳐다보고 있었다.


4시 정각이 되자 저기 멀리서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한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보였다. 반가움에 달려가니 “네가 표니?”하며 다정하게 불러주셨다. 왜 난 그가 할아버지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크게 안심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킹홀리데이로 온 이유와,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정착하게 된 계기, 그리고 내 학과와 학교 이야기까지.


아무튼 현관부터 으리으리해 보이는 집 안으로 들어가니 마찬가지로 2중 digicode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이번 집은 규모부터 달랐다. 한 3명이 타도 충분히 넓어 보이는 엘리베이터에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입구부터 굉장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안락의자에 앉아 계셨고, 집은 할머니 방, 할아버지 방, 부엌, 식당, 화장실, 욕실, 방 1, 방 2 이런 구조였다. 앞서 너무 좁은 집을 봐서 그런지 이 집은 정말 크고 좋아 보였다. 천장도 높고 방도 넓고. 내가 쓰게 될 방도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좋아서 감동했다. 사기고 뭐고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군데에서 더 연락이 온 상태라며 네가 좋다면 이미 사람 구했다고 말하겠다고 하셔서 나는 아주 좋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성사되는 분위기가 되었고, 할아버지께서는 차나 한잔 하자며 커피를 내려 주셨다. 에스프레소와 케이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이왕이면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하셔서 냉큼 그러겠다고 답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간호조무사가 왔고, 나는 할머니 곁에서 내 전임자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일은 간단했다.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떠다가 세팅하고, 간호조무사가 기저귀를 갈기 위해 할머니의 몸을 돌려 눕힐 때 옆에서 잡고 있으면 되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의 중요한 부위와 기저귀를 갈 때 보이는 분비물은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워낙 비위가 강하고 둔한 성격의 나라서 그런 것쯤은 월세 300유로에 충분히 감안되는 조건이었다.


할아버지는 불어학 박사셨고, 할머니는 아프시기 전 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박사님, 할머니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예의였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도 도와주고, 이미 한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9시 조금 넘어서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집과 가까운 몽파르나스 타워도 보았다.


참 운이 좋은 하루다. 아침부터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모든 일이 술술 다 잘 풀렸다. 일도 잘하면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 걸까?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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