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수첩에서
깊은 산골, 숲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몇 해가 지났어도 날마다 새로웠다. 도시가 싫어서 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몇십 년 살았던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반성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늘 머릿속에 그림으로만 그려져 있던 산골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부딪혀 보자는 마음이 컸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 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평화롭다는 것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시골 생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귀촌을 하면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마저도 없었다면 용감했던 것인지 무모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았던 것에 비하면 대책 없이 들어온 자연의 품은 믿는 구석이 있어 기대는 엄마의 품과 같다고나 할까. 하루하루가 편안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아우성치는 미생물의 표정들을 느껴 본 적 있었던가. 아침에 노래하는 새소리를 따라 함께 노래해본 적이 있었던가. 또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있었던가. 온전히 혼자가 아니면 느껴 볼 수 없는 일들이라고 나는 감탄하며 살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잘 모른다. 함께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지나가는지를… 그렇다고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속에 묻혀 산다 해서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은 너무 빠르게 모든 것을 삼켜가는 삶이었고 얽히고설키며 겨뤄야 할 대상은 늘 사람이었던 것이 그저 답답했을 뿐이다.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으로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 자식들이 다 커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자리를 찾아가며 난 혼자가 되었으니 돌봐주지 않아도 될 때에 혼자가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덕분에 산과 들을 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들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요즘 자주 생각나는 성서 구절이다. 왜 아니겠는가! 산책길에 만나는 들꽃은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다르다. 비가 오는 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선물, 그리고 맛있는 선물, 자연이다. 새봄에 나오는 모든 풀꽃들 중 먹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 천천히 걸으며 민들레, 제비꽃, 씀바귀 등등... 한 잎씩만 따도 한주먹이 넘는다. 풀꽃 한 접시, 그것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먹거리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들이 즐겁기만 하다.
공중의 새들도, 길가의 들꽃도 우리 인간들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멋있는 옷을 입으며 살게 해 주시는데 무엇이 못 미더워 나는 그동안 회색의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왔을까.
새벽바람으로 실려 오는 하느님의 선물, 소중하게 가꾸고 다듬는 하루가 시작된다.
푸르른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