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가을이

프라하, 그 낭만 뒤의 시간

by 혜솔

프라하라는 도시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낭만을 떠올린다. 자유로운 공간적 분위기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여유롭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프라하엔 낭만적인 분위기의 장소도 꽤 많다. 강변길에 조성된 공원과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의 숲길과 잔디밭,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들, 일일이 그 장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여행자들에게 이름다운 배경이 되어줄 곳들은 곳곳에 있다. 그런 장소에서 사람들은 눕기도 하고 앉아 쉬기도 하며 여유를 즐긴다.

내가 프라하에서 지내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많이 부러워했다. 이국의 도시가 주는 분위기가 그 부러움의 대상이겠다. 하지만 나는 프라하에서 낭만에 젖을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활의 뒷면엔 낭만을 넘어선 노동이 있고 귀중한 나의 시간에 고단함을 덮어 씌우기도 한다. 그것은 특정한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내가 선택한 날들에 대한 나의 처세였을 뿐이다. 그래서 한치의 아쉬움이나 후회 같은 것은 없다. 단,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주, 객의 관계나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의 미묘한 감정들을 빼고는...
내가 프라하에 살면서 추구한 것 자체가 낭만적이고 럭셔리한 여행자의 입장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프라하가 낭만의 도시라 해도 내 입장에선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그런 감정에 젖어들기에는 너무나 번뜩이는 이성을 지녔기에 가능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만큼 내겐 나와 약속한 시간 동안의 현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하는 내 삶에 가장 신선한 산소를 불어넣어준 곳인 것은 확실하다.




프라하가 내게 준 것은 푸른 공간이었다. 휴일을 이용한 나들이가 가까운 곳의 자연 속이었고 사람은 자연과 가깝게 지낼 때 가장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또 한 번의 깨달음이었다. 일찍이 나도 산 중턱에서 몇 년을 살아왔지만 그때는 내가 손님 같은 마음이었다. 워낙에 도시와는 경계가 분명했고 친구가 찾아오기엔 늘 먼 곳이었다. 그러나 프라하에서는 동네 골목길만 벗어나면 숲이 있었고 숲으로 들어서면 그 순간 나도 숲 속의 일부가 되어 모든 게 내 것이나 다름없었다. (숲에서 내가 원하고 취득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것 만으로도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 삶의 질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흔히들 생각하는 여행객으로서의 낭만과는 분명 다르다. 욕심 많은 내가 숲에서 건질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바람소리, 흙냄새, 오다가다 따먹은 열매들, 새싹 몇 그램이 모여 향기로운 차를 만들 수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모여 내 것이 되어 가는 그런 휴일이 내겐 가장 큰 낭만이었고 힐링의 시간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내 것으로 남는 것은 그런 시간들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 시간들이다.
그러나 항상 부대낌은 어디서고 존재하는 법,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 익숙한 나도 인간과 맞물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조금 힘들다. 내가 선택한 일, 또는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 맞는 일을 처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적어도 내 삶의 모토가 '언행일치'의 인간으로 살자, 여서 인지 내가 하겠다고 말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고 마무리하려는 자세는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으로나마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이것이 결점인지 장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타국의 생활은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들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럴 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때이다. 아무하고도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람소리가 있고 숲 향기가 스며들며 흙냄새가 주는 따뜻함이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그런 곳이 집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면 천국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나를 정화할 수 있는 곳, 내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는 곳이 숙소 가까이에 있다는 것으로 나는 결코 쉽지 않은 프라하의 생활을 무던하게 할 수 있었다. 낭만의 도시 프라하에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낭만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시간을 즐겼다.

오늘도 나는 빗소리를 연주하는 하늘을 향해 중얼거린다.

"가을이 오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