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와 함께 배우는 플라스틱의 비밀
"할머니! 이 요구르트병 내가 깨끗하게 닦았어요!"
주말 오후, 네살 손자 로리가 자랑스럽게 쭈그려 앉아 자기가 먹은 음료수병을 내민다. 꼬물꼬물 작은 손이 그 플라스틱 병을 분리수거함 통에 넣는 모습이 영락없는 '분리배출 모범생'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면, 나는 늘 '이렇게 깨끗이 헹구고 분리하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거지'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기도 했다. 깨끗이 씻어서 정성껏 분리한 플라스틱은 모두 재활용이 될까?
뫼비우스의 띠에 숨은 숫자의 비밀
▲재활용 '뫼비우스의 띠'를 공부하다. ⓒ sigmund on Unsplash관련사진보기
아빠와 분리배출을 하려고 나가던 로리가 작은 스티로폼 상자 하나를 들고서 물었다.
"할머니, 이건 왜 플라스틱에 안 넣어요? 플라스틱이 아닌가요?"
그 질문은 내가 무심히 지나치던 플라스틱 용기 바닥의 '뫼비우스의 띠'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다.
세 개 화살표, '뫼비우스의 띠' 속 숫자들(1번~7번), 우리는 그 숫자를 '재활용 가능 마크'라 믿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플라스틱의 재질을 구분하는 코드, 일종의 '계급장' 같은 것이었다.
로리가 닦아 넣은 요구르트병도 알고 보니 6번(PS), 재활용 가능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부서지기 쉬운 재질로 재활용 시스템에서는 결국 대부분 소각장으로 향하는 운명인 것이었다. 나는 환경부 자료실에서 다운 받은 분리배출표 마크 번호를 하나씩 짚어가며 재활용의 가능과 불가능을 익히고, 로리는 숫자 공부를 했다.
플라스틱 '계급장'
1번(PET), 2번(HDPE), 5번(PP)은 생수병, 세제통, 반찬통 등 투명하고 단일 재질로 깨끗하면 다시 고품질 원료로 태어나는 '재활용의 우등생'이다. 우리는 이 착한 플라스틱들을 깨끗이 헹궈 펠릿(작은 알갱이)이 되어 옷이나 가구, 장난감으로 새로 탄생하게 한다. 하지만 몸체와 뚜껑의 재질이 다른 경우 분리해야 한다. 라벨은 거의 재활용이 불가하므로 반드시 떼어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4번(LDPE), 6번(PS)는 택배의 뽁뽁이, 하얀 스티로폼 등으로 '유예 계급'이다.
"할머니, 이건 플라스틱통에 넣을까요?"
로리가 뽁뽁이를 터뜨리며 놀다가 묻는다.
"아니, 얘는 너무 가벼워서 재활용장 기계에 엉키고, 스티로폼은 기름기나 테이프가 있으면 재활용이 안 된대."
로리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그냥 버려야 해요?"
"그래, 아주 깨끗한 것만 재활용되고 나머진 태우는 곳으로 보내진대. 그래서 덜 쓰는 게 중요하단다."
로리는 잘 이해 할 수 없었는지 눈을 깜박이다가 뭔가 다름을 느끼는 듯했다.
"할머니, 분리배출 너무 어려워요. 요구르트 병도 그냥 막 버리고..."
"요구르트병은 병마다 달라. 단단한 건 씻어서 분리하는데, 얇아서 부서지기 쉬운 건 일반 쓰레기로 버리는 게 낫다는 거야."
말하는 나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이렇게 재활용은 가능하지만, 오염에 극도로 취약한 것들이 분리하기에 성가신 것들이다. 테이프나 운송장이 붙은 뽁뽁이, 기름이나 양념이 밴 스티로폼은 아무리 애써 분리해도 결국 '재활용 잔재물'로 분류되어 소각장으로 향하는 '유예 계급'이었다. 우리가 깨끗하게 씻어 분리하는 정성이 이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3번(PVC)', '(OTHER)'는 외면 받는 골칫덩이다. PVC는 염소 성분이 있어 유해 물질을 배출하고, 7번 'OTHER'은 여러 재질이 샌드위치처럼 붙어 있어 기계가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세척 및 분리 비용이 새 플라스틱을 만드는 비용보다 더 많이 든다는 것이다. 해당 재질의 즉석밥 뚜껑, 과자 봉지 등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로리가 갑자기 물었다.
"할머니, 과자 먹고 나서 잘 분리해도 다 쓰레기예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가 덜 사고, 더 깨끗이 버리는 게 진짜 재활용이야. 할머니도 로리 덕분에 다시 배우는게 많구나."
진짜 재활용의 시작
3R. 'Reduce(줄이기), Reuse(다시 쓰기), Recycle(재활용)' 이 세 단어가 진짜 순환의 핵심이다. 우리는 대개 늘 마지막 'Recycle(재활용)'만 실천했지만, 이제는 '줄이기'와 '다시 쓰기'부터 생각해야 한다. 로리와 나는 주방 앞에서 약속을 했다.
"로리야, 이제부터 우리는 착한 소비를 하자. 3번이나 7번은 안 사고, 무라벨 음료만 사기."
"착한소비가 뭐야 할머니? 좋은 거야?"
"포장이 크고 분리하기 어려운 것들은 안 사는 게 좋아. 장난감도 너무 많으니까 고장 나고 망가진 건 고쳐서 쓰자."
로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무룩한 소리로 물었다.
"근데 할머니, 나 밥 잘 먹고 양치 열 번 잘 하면 자동차 하나 사준다 했잖아요?"
나는 웃으며 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리 방에 자동차가 너무 많아, 그게 다 플라스틱이야. 있는 것을 또 사는 것은 지구를 너무 많이 아프게 하는 거라고 그림책 보며 공부했잖아? 있는 것은 안 사는 게 착한 소비야."
국내에서는 매년 240만 톤 이상의 장난감이 버려진다고 한다. 그린무브공작소처럼 고쳐서 나누는 이들이 있다는 걸 로리에게 알려주자, 로리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망가진 건 버리지 않고 고쳐서 친구한테 나눠 줄래요."
깨끗함과 절제의 습관
실천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 깨끗함에 투자하기 –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 대신, 한 번 더 헹군다.
② 무라벨 제품 고르기 – 라벨이 없으면 분리도 간단하고 재활용 품질도 높다.
③ 하루 쯤은 아무것도 사지 않기 – '소비를 줄이는 날'을 만들어 지구에게 쉼을 준다.
실제로 아무것도 사지 않은 날을 신경 써서 지키고 있는 중이다. 내가 마트에 가지 않은 날, 아무것도 사지 않아 뿌듯해 하자 로리가 내게 속삭였다.
"할머니, 오늘은 아무것도 안 샀으니까 지구가 쉬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 뫼비우스 띠에 숫자 하나 더 넣었다. 0번, 바로 '환경 교육'이다. 재활용의 시작은 플라스틱 분리배출 보다, 습관화를 통해 터득한 아이의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았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지구를 아프게 하지 않을 날,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로리와 함께 '최소한의 소비'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