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길의 찬 바람
“할머니, 개구리는 다 어디 갔어?”
로리가 길을 걷다가 추수가 끝나가는 논을 보며 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논두렁마다 개구리들이 뛰고 노래하며 놀던 곳이었다.
여름엔 그토록 시끄럽던 소리가, 가을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자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나도 잠시 생각해 보니 늘 들려오던 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개구리의 겨울잠은,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지키는 지혜다. 개구리뿐 아니라 곰, 고슴도치, 도마뱀, 심지어 일부 곤충까지 춥고 먹이가 부족한 계절엔 움직이지 않음으로 생명을 보존한다.
심장박동은 느려지고, 호흡도 가늘어진다. 그 고요한 시간 동안 자연은 에너지를 아끼고, 다음 봄을 위해 천천히 숨을 고른다. 이건 단순한 생존 기술이 아니라, 자연이 생명에게 건네는 선물 같은 휴식이다. 멈춤이 있어야 다시 시작이 가능하다는, 자연의 오래된 교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리야, 개구리들은 지금 겨울잠을 자려고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아. 논둑 흙 속이나 돌 밑, 낙엽 더미 속에서 자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로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진짜 잠을 자? 밥도 안 먹고?”
“그래, 아주 오랫동안 자는 거야. 숨도 아주 천천히 쉬고, 심장도 자는 동안 느릿느릿 뛰지.”
내 말에 로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개구리들은 언제 일어나서 나오는데?”
"봄이 오면 따뜻한 햇살이 땅을 깨워주니까 그때 기지개를 켜면서 나올 거야"
겨울이 오는 들판은 조용하고 삭막하게 보인다. 개구리울음도, 가을의 풀벌레 소리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생명의 숨결로 느껴진다.
곧 흙이 얼고,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자연은 더 깊은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꿈꿀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리듬에서 점점 멀어졌다. 도시는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사람들은 사계절 내내 같은 속도로 살아간다. 멈춤이 사라진 자리엔 피로와 소음이 쌓이고, 쉼 없이 돌아가는 시간은 결국 우리 자신을 소모시킨다.
하지만 개구리들은, 아니 자연은 안다. 한 계절을 쉬는 것은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임을. 겨울잠은 죽음이 아니라 다음 봄을 향한 조용한 약속인 것을. 인간도 자연처럼 ‘멈추는 용기’를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오후에 걷는 이 길, 로리와 함께여서 좋았고, 자연의 숨소리가 들려서 좋았다. 여름엔 유난히 개구리소리가 우렁차서 개구리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 가족끼리만 통하는 길 이름이다.
“할머니, 저기 좀 봐요! 까치들이 다 논에 앉아있어!”
로리가 손가락으로 들판을 가리켰다.
“할머니, 저 새들은 뭐 먹고 있는 거야?”
콤바인이 지나간 자국이 선명한 논, 얼마 전 추수한 빈 논엔 가지런한 볏짚 사이사이로 낱알들이 수북하겠다.
고구마를 수확한 빈 고구마 밭에 까치떼가 앉아 땅속에서 많은 먹잇감을 찍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었다. 수확을 마친 땅은 새들에겐 빈 땅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벼를 다 거둔 줄 알았는데, 까치밥을 남겨 놓았나 봐. 까치들이 오늘 잔치하는 중이네.”
"할머니! 논에는 벼가 있고, 그 벼에는 쌀이 붙어서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거야 맞지?"
"맞아 맞아, 이제 쌀은 사람이 먹고, 이 논과 들판은 새들이 주인이 되는 거야"
이제 겨울로 접어드는 개구리길의 모습은 썰렁하다. 하지만 우리가 걷는 발아래, 흙 속에서 들리지 않는 숨소리를 느낄 시간이다. 겉으론 텅 비어 가지만, 그 안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로리도 알아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