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경계가 흐려진 아침에
며칠 전 아침, 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문득 계절의 경계를 잃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전날의 서늘함을 기억한 탓에 손자에게 가을 체육복을 입혀 보냈다. 긴팔과 긴바지, 추석이 지났고 며칠 비가 내리던 날씨를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꼈다. 공기는 여름처럼 묵직했고, 햇살은 얼굴을 뜨겁게 눌렀다. 순간, "아, 내가 잘못 입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육 하는 날이라서 체육복을 입혔고 당연히 긴팔 긴바지였다.
혹시나 해서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체육 시간에 뛰고 놀 텐데 옷을 너무 덥게 입힌 것 같아요, 얇은 옷으로 가져다 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괜찮아요, 에어컨 가동 중이에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10월 중순에 에어컨이라니. 내 어릴 적 10월의 공기는 차고, 바람은 뺨을 스치며 서늘했다. 밤에는 손끝이 시릴 만큼 냉기가 돌았고, 가을 운동복은 언제나 긴팔과 긴바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덥지 않게'가 '춥지 않게'보다 더 중요한 계절이 되어버렸다.
기상청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나의 체감이 결코 어느 아침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전국 평균기온은 16.1℃로, 평년(14.3℃)보다 1.8℃나 높았다. 게다가 10월 중순에 에어컨을 켜야 할 정도의 날은 한두 해의 특이 현상이 아니라 점점 '보통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10년 동안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은 10년에 0.34℃씩 상승했고, 세계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더워지고 있다. 지구 평균 상승폭이 1.5℃라면, 한반도는 이미 3.6℃나 오른 셈이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고, 해수면 온도 역시 평년보다 2℃ 이상 높게 유지되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오지 못하고, 여름의 꼬리가 질긴 실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변화하는 지구의 신호를 읽는 작은 실천의 시작
생각해 보면, '기후 위기'라는 말을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들으며 지금이 아닌 미래의 일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 아이의 옷 한 벌을 고르다 깨달았다. 기후 변화는 거대한 재난의 그림자만이 아니라, 하루아침의 옷장 속에서도, 내 손끝에서도, 아이의 땀 한 방울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걸.
한때 10월은 사과의 향기로 가득한 달이었다. 감이 붉게 물들고, 밤이면 찬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제는 그런 '계절의 질서'가 흐려지고 있다. 가을은 더 이상 천천히 다가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더위와, 그다음 날의 한기가 뒤섞여 우리 몸의 리듬을 헷갈리게 만든다. 기후가 뒤섞이니,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불안하다. '내일은 뭘 입혀야 할까' 하는 단순한 고민이 사실은 변화하는 지구의 신호를 읽는 작은 실천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창문을 열었더니 햇살은 여름빛이 남아 있었다. 매미 울음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데, 공기 속엔 계절의 혼란이 섞여 있다. 나는 손자의 옷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팔 티셔츠와 긴 티셔츠를 함께 걸어두었다.
이제는 날씨 예보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의 체온, 햇살의 기울기, 그리고 공기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껴야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옷 한 벌 고르는 일은 '감각의 윤리'가 되고 있다. 이 시대엔 손자 옷도 잘못 입히는 센스 없는 할머니가 되기 십상이다. 내가 느끼는 이 작은 변화는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큰 이상 신호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10월의 에어컨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작은 실천이라도 이 변화를 늦추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손자와 함께 도서관과 집 주변을 돌며 꾸준히 플로깅을 하는 일이나 텀블러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나가는 일처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의 기후'를 견디는 삶이 아니라 '다시 계절을 되찾는 삶'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가을 아침의 더위는 내게 묻는다. "당신의 가을은 안녕한가요?"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창가에 손을 내밀어본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그 바람 속에서, 다시 한번 계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가을, 아직 너를 믿고 싶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