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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도 철학이 있다

흙을 아는 마음, 환경을 배우는 손

by 혜솔

며느리가 퇴근길에 텃밭에 들렀다. 그곳엔 서로 마음이 통하는 텃밭 언니들이 있다. 각자 기른 작물로 반찬을 나누며 함께 정보도 주고받는 곳이다. 며느리는 퇴근 후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언니들과 서로 도우며 이웃의 정을 나누고 있다.

▲무름병을 물리치고 잘 자라고 있는 로리의 배추들, 고맙다. ⓒ 신혜솔


비 오는 날의 배추밭


그날은 조금 다른 일이 발생했다. 김장용 배추에 무름병이 발생한 것이다. 잦은 비로 습기가 많던 날이라 병이 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며느리는 언니들과 함께 병든 잎을 떼어내며 "이럴 땐 빨리 무름병 약을 줘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고, 집에 있던 나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빨리 약을 사서 뿌려야겠어요."

나는 이미 하루 전에 예방약을 뿌려두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배추는 멀쩡했었다.

"굳이 또 줄 필요는 없어. 너무 자주 약을 주면 땅이 상해."

그렇게 말했지만, 며느리의 마음은 불안한 듯했다. 비가 오면 병이 더 퍼질 거고, 잘 자라던 배추를 다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을 거다.

나 역시 배추들이 모두 못 쓰게 될까 봐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배추가 이미 병이 들었다면, 비가 와도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낫지." 그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결국 다음 날, 비가 오더라도 약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며느리가 텃밭 언니들과 상의한 뒤 전한 말은 달랐다. "곧 비가 내릴 텐데 비가 오면 약을 주나 마나래요. 비 그치면 주는 게 좋대요" 어제는 ‘비 오면 병이 더 번지니 빨리 약을 줘야 한다’ 더니 오늘은 ‘비 오면 약을 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농사라는 게 이렇게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 따라가며 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 내심 언짢았다.


정겨운 도움, 그러나 불편한 마음


텃밭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내 방식대로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약이니 영양제니 하는 것보다, 그저 내 손길과 관심으로 배추들이 자라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솔직히 여름작물들도 그렇게 키워서 잘 먹었고, 그게 내 방식이었다. 김장 배추를 심으면서는 여러 정보를 취했다. 배추는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고 제때제때 약도 쳐 줘야 하는 게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난 농약 성분보다는 친환경적 자연 요법으로 할 수 있을 만큼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병들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한다고 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가을장마처럼 날마다 비가 오는데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예방 차원에서 두어 번 친환경 방제 처리를 했는데도 병이 난 것이다.

어쨌거나 병든 자식에게 약이나 주사 한 번 안 맞히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이웃들의 조언에 따라 나는 조용히 흙이 닿는 부분에만 살짝 약을 주고 오기로 했다. 며느리와 손자도 함께였다. 텃밭에 도착하니 좀 전까지 안 오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텃밭 언니들이 뒤따라 도착했다. 비 오는 날 약을 치면 흘러내리지 않게 도와주는 보조제가 있다며 그 약을 가져온 것이다. 결국 언니가 내 배추에 꼼꼼하게 약을 직접 쳐주었고, 잠시 후에는 언니의 남편까지 나왔다. 어린 손자는 우산을 쓰고 신나게 돌아다녔고, 이웃은 내 밭에 약을 치고 있고, 또 다른 언니는 비를 맞고 서 있는 내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정겹고 고마운 마음 뒤로 편치 않은 마음이었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커져 있었다. 편하게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날의 상황이 열 평 남짓한 밭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서로 다른 ‘텃밭 철학’이 조용히 부딪히는 자리, 그곳이 바로 내 배추밭이었다.


흙과 함께 사는 법


나는 농작물에 농약을 가능하면 주지 않으려 한다. 벌레가 잎사귀를 조금 갉아먹더라도 그건 자연의 일부라 생각한다. 깨끗하고 완벽한 배추를 원한다면 마트에 가면 된다. 굳이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릴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몇 년 시골살이를 할 때 앞마당 텃밭에다 갖가지 채소를 다 길러 먹었었다. 그때는 모종 심기 전 퇴비 외엔 비료도 주지 않고 다 키워서 김장까지 했는데...? 진짜 그랬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텃밭에서 사용하는 농약도 미량의 잔류 성분이 남을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비가 올 때 뿌려진 약제는 빗물에 섞여 인근 토양이나 배수로로 흘러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흙을 덜 괴롭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비가 오는 날 약을 듬뿍 치게 된 것이다.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내가 내 중심을 못 잡고 잠시 흔들렸으니. 그리고 이웃의 조언에 따르더라도 반드시 나의 마음이 중요했던 것을 잠시 망각했다. 그건 아마도 주말농장이 나의 소유가 아닌 공동의 텃밭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텃밭을 가꾸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손자 로리와 함께 자연을 느끼고, 가족이 함께 생명의 순환을 눈앞에서 지켜보기 위해서다. 로리에게 자연은 좋은 선생님이자 놀이터다. 흙을 만지고, 벌레를 보고, 싹이 돋는 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지구를 위한 마음’도 배운다.

흙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 땅강아지를 찾는 로리/땅강아지야 어디 있어? 엄마 아빠 퇴근하셨니? ©신혜솔


각자의 속도로 배우는 생태의 수업


며느리의 조급함도 이해한다. 경험이 없는 우리 가족의 첫 텃밭이니 언니들의 말을 따르는 게 당연했다. 결국 내 조용한 의도와 며느리의 선의가 엇갈리며 우리 둘 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괜히 고집을 부린 것 같아 미안했고, 며느리는 우리 때문에 이웃들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며칠 뒤,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 며느리에게 나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로리를 생각해서라도 밭에 약을 많이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누구든 자기 밭의 일은 자기가 책임지면 돼. 텃밭은 정답을 써야 하는 시험지가 아니잖아. 자연은 우리에게 스스로 깨우침을 바랄 거야. 우린 그걸 터득하는 사람이면 충분하지. 이번 일은 우리가 실수한 것 같다." 며느리도 공감해 줬다.

"엄마, 앞으로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서 우리 텃밭은 우리 생각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앞으로는 언니들 조언은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게요."

몇 평 안 되는 밭이지만 손수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즐거움이다. 또한 텃밭에는 ‘상품’이 아니라 ‘삶의 맛’이 있다. 벌레 먹은 잎도, 작게 자란 배추도, 그 속에는 흙을 향한 손길과 나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그게 바로 텃밭의 가치였다.


자연이 가르쳐준 마음의 균형


그날의 텃밭은 교훈을 남겼다. 비가 내리고, 병이 돌고, 마음이 흔들려 작은 오류를 범했지만 결국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깨우쳤다. 누군가는 흙을 ‘길러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나는 흙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로 여긴다.

조금 못나게 자라고 조금 덜 수확하더라도 나의 배추와 무들이 바람과 햇빛과 땅의 기운으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정성껏 하는 데까지 하고 난 후의 결실에 만족하면 된다. 완벽함보다 중요한 건 지속할 수 있는 마음의 균형이니까.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도 매일의 작은 선택 속에서 조금 느린 ‘내 방식’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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