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포르투갈
28번 전차
가파른 생의 비탈을
노란 등 굽은 벌레 한 마리
올라간다
쇠바퀴가 선로를 긁는 소리
오래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파두(Fado)
멈춰 선 곳마다 기다림은
녹슨 이정표가 되고
창밖으로 스치는 색색의 빨래들
누군가 널어 놓은 어제의 문장들이다
정거장은 멀고 노을은 강물 위에
붉은 인장을 찍는데
덜컹이는 몸속에 실린 것은
도착할 수 없는 곳을 향한 지독한 허기
사우다드
선로가 끊긴 곳에서 시작되는 여행
기억의 궤도를 이탈한 불빛이
바다를 향해 눈을 감는다
TV를 자주 보는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마음을 붙잡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낯선 도시를 떠돌며 버스킹을 하던 뮤지션들, 어디서나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모여들던 그 방송 프로그램은 〈비긴 어게인〉이다. 어느 날 화면 속에 리스본이 나타나는 순간, 오래전 그 도시에 머물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노래가 시간을 불러오듯, 그 장면이 나의 기억을 깨웠다. 한때 그곳을 걸었던 발걸음이, 이제야 문장이 된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노란 전차 안에서 쇠바퀴가 선로를 긁는 소리가 오래된 심장처럼 울렸다. 창밖으로는 사람의 흐름이 끊이지 않았다. 웃음과 셔터 소리, 낯선 언어들이 서로를 밀치며 번져 갔다. 도시의 표정은 환하고 활기찼지만, 그 틈에서 조금 비켜선 내 마음은 조용히 떠밀려 나와 있었다. 그때 그 여행에서도 군중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고요를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전차는 느리게 흔들렸고, 그 느린 리듬에 맞춰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오래된 유성기처럼 파두의 애절한 음성이 스며들고, 리스본의 시간은 전차 안에서만큼은 조금 더 천천히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 느린 틈은 생각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살피게 만드는 은밀한 쉼표였다.
여행지에서조차 사람과 어깨를 맞대며 움직이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낯선 도시일수록, 혼자 걷고 혼자 바라보며,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에서도 그 습관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북적이는 광장을 지나고, 유명 관광지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마음은 늘 조금 뒤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의 고독은 외롭지 않았다. 그 고독은 세상과 단절되는 감정이 아니라,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투명한 렌즈에 가까웠다. 함께 있지만 혼자가 되고, 혼자인데도 세계와 닿아 있는 묘한 순간들. 리스본은 그런 시간을 허락하는 도시였다.
브라질에 자주 갔었던 기억은 포르투갈어로 기본적인 일상을 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는 관광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가지도, 완전히 현지인으로 섞이지도 못한 채 묘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애매한 자리 덕분에, 도시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리스본을 바라볼 수 있었다. 너무 가깝지 않아 숨 막히지 않고, 너무 멀지 않아 낯설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그 거리감이 만들어 준 시선 덕분에 도시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다가왔다.
좁은 골목을 가르며 움직이는 전차 안에서 리스본의 문학적 그림자들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고독을 견디며 자기 자신을 수많은 자아로 나누었던 페르난두 페소아, 인간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졌던 주제 사라마구의 사유가 도시의 바람결에 겹쳐졌다.
그들의 문학은 거창한 철학적 선언이 아니라, 이 도시의 일상 속에서 천천히 숨 쉬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를 잃지 않는 일, 소음 속에서도 내면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지켜내는 일. 리스본은 화려한 장면보다 이런 태도를 더 깊이 가르쳐 주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언덕 위에서 잠시 멈춰 서며 포르투갈어로 서툰 주문을 건넨 순간들, 전차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순간들이 천천히 쌓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여행이 남긴 가장 선명한 유산은 거창한 발견이나 극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누구도 대신 건드릴 수 없는 작은 고요. 세상이 소란스러워질수록 더 소중해지는 침묵의 결. 리스본에서 붙잡고 있던 그 고독 덕분에, 일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잠시 멈춰 서는 삶을 배웠다.
28번 전차는 흔들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마음도 그 진동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불안한 흔들림이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향해 옮겨 가는 호흡 같은 움직임. 도착을 서두르지 않는 도시, 서성이는 시간을 허락하는 도시. 리스본은 그렇게 작은 고독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 여행의 기억도 오래도록 흔들리며 남아 있다.
https://youtu.be/GlFhBdYuGiM?si=XYierA57oO_rr6xn
'파두의 여왕'으로 불리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대표작입니다. 이 곡은 리스본의 정체성 그 자체인 '사우다드'를 가장 깊고 서늘하게 표현한 명곡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이상한 삶의 방식)이라는 제목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여 낯선 인생을 마주하는 사유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도 같지요. 곡 전체를 관통하는 기타 선율의 리듬감이 가파른 언덕을 묵묵히 오르는 노란 전차의 덜컹거림과 묘한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음악에 대한 설명도 작가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