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
다 내려놓고 나니 현 시각, 나의 찐 HP가 느껴졌다.
걸을 힘도 없고 생각할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어...
터덜터덜 정자 비스무리한 곳에 앉아 멍을 때렸다.
지루해질 때쯤 일어나 다른 멍스팟을 찾았다.
창문 너머로 번쩍이는 부처상이 눈에 띄었다.
절인가보네.
건물 벽에는 한 땀 한 땀 옥색 비즈가 박혀 있었다.
만든 사람들을 상상하니 뭔가, 경건해졌다.
절 안으로 들어섰다.
희뿌연 연기와 함께 은은하게 기분좋은 향 냄새가 맴돌았다.
절 안 구석탱이 의자에 앉아 다시 멍을 때렸다.
곳곳에 기도 올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어딜 가든 사람은 많아도 조용했다.
멍 때리기 좋은 동네네.
다음은 어디 가지.
구글지도를 켰다.
근처에 강이 있네.
가보자.
강 쪽을 향해서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넘실대는 강물 위로 노을 진 해가 보였다.
빨갛게 노랗게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다시 멍을 때렸다.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소 지으며 떠나 보냈다.
그렇게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하루를 보냈다.
해가 산 너머로 숨어들었다.
남색 분홍색 보라색으로 하늘이 뒤섞일 무렵,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 끝자락에 공원이 보였다.
공원 벤치에 앉아 또 멍을 때렸다.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주구장창 하늘만 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뭐해? 혼자왔어?”
“응 혼자왔어. 하늘 구경하는 중이야.”
“나도 혼자인데! 나는 일하다 왔어. 일하면서 여행하고 있거든.”
“아하, 무슨 일하는데?”
“컴퓨터 관련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일이야.”
“멋지네. 나도 오래 자주 여행 다닐 수 있는 직업 갖고 싶다.”
“요즘 많이들 이래! 여친이 있다면 트러블이 많겠지만..ㅋㅋ”
“아, 여친 있는데 놔두고 혼자 여행 다니는 거야?ㅋㅋ”
“아니 지금은 헤어졌어.
내가 자주 사라지는 것 때문에 다퉜거든...
하지만 난 이런 삶이 좋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그럼 너랑 같이 여행 다닐 수 있는 사람 만나면 되지.
너처럼 여행 다닐 수 있는 직업을 가졌거나,
직업 없이도 너 따라 여행 다니는 삶이 괜찮은 사람 만나면 되겠네.”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럼!”
“넌 왠지 그런 사람일 것 같아.”
(ㅎㅎ 이 자식 수작 부리네)
손절각을 재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어?”
“나는 한국 사람이야”
“오~ 나는 독일에서 왔어.”
“오 진짜? 나 독일 가봤어! 소도시가 엄청 많더라.
특히 밤베르그 너무 좋았어. 작은 데 있을 거 다 있는 느낌?”
“밤베르그 좋지. 나도 한국 가봤어. 서울.
근데 일본 갈 때 잠깐 들린 거라 너무 짧게 가서 또 가고 싶어.”
“You should!”
“I will! ㅋㅋ 흠… 시간이 많이 됐는데 같이 저녁 먹을래? 내가 살게. 좋은 레스토랑 알고 있어.”
“아니 나 여기서 더 머물고 싶어^*^”
“아 그래?;;
so… have a good time!”
“you too~ have a great dinner~ ^*^”
동공지진을 읽었지만 모른 척하고 떠나 보냈다.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일하면서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있구나.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면 되는 거네?
저렇게 전세계를 누비면서 살 수도 있는 거야.
갈수록 사는 모습이 다양해지겠지...
내가 사는 모습은 어떻지?
지금처럼 살면 되는 건가?
...이게 내가 바라던 모습인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여자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방금 만난 독일인 남성은 아주 젠틀한 편.
길을 걷는데 단체로 수근거리면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Hot 하고 가기도 하고 정말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하나하나 성희롱 당했다 조롱 당했다 인종차별 당했다 스트레스 받고 숨어 다니면 굉장히 여행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냥 thank you~하고 웃어준다.
내가 외국인한테 인기있는 타입인가봐,
한국에서 못 찾음 외국인 만나면 되겠네?! 하하핳 하면서 웃어넘긴다.
들어온 걸 욕으로 받아들일지, 칭찬으로 받아들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칭찬으로 받아치면 상대는 칭찬한 입장이 되어버린다.
어라? 하면서 동공지진 나거나,
뷰티풀, 따봉 같은 걸 날려주면서 머쓱한 웃음과 함께 사라지신다.
화내거나 주눅들기보다는 기존쎄로 맞서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물론 더 심하게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
주변을 계속 맴돌다가 첫눈에 반했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고,
펍에서 춤추고 노는데 같이 나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 NO하면서 두 손을 X자 만들고 도리도리 하면 (확실한 의사표현) 정상적인 남자들은 다 물러선다.
거절의사를 밝혔는데도 더 다가온다면?
가게 직원한테 물리쳐달라고 부탁하거나,
옆에 있는 다른 남자분에게 부탁하면 된다. (모르는 사람이어도 됨..!)
그럼 마치 친 여동생을 챙기는 것처럼ㅋㅋ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
그러다 도와준 무리와 친구가 되어 안전하게 놀다가기도 한다.
특히 직원한테 부탁을 하면 그 가게를 갈 때마다 나를 마킹해준다.ㅋㅋㅋ
그렇게 단골가게를 만들면 훨씬 감성터지게 놀 수 있다.
그 시절 여행을 돌이켜보면 가게와 가게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장 큰 추억이 되니까.
'도와줄 명분만 생기면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이구나.'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도 많구나.'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사람에게 치유도 받는구나.'
하는 것들을 나는 여행을 하면서 배웠다.
안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항상 되뇌었다.
'그런 경험, 그런 사람 때문에 손해보고 살고 싶지 않아.'
이런 불상사들이 무섭고 불편해서 경계심을 MAX로 세우고 다니거나,
남자와는 아예 말을 섞지 않고 다니면 결국 나만 손해다.
여행하다 사귄 남사친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기도 하니까.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기회가 찾아와주었다.
또 보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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