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도피 여행기 6

내려놓는 법_ 안 괜찮아

by 아르미





왓 프라깨우


절인지 궁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 전부를 금으로 떡칠할 생각을 하다니…

가까이서 보니 황금색을 바른 결이 살아있었다.

좀 덕지덕지 바른 거 같기도 하고ㅋㅋㅋㅋ

‘can you…’

넋 놓고 구경하는데 한 무리가 쭈뼛쭈뼛 사진기를 내밀었다.

허리를 꺾어가며 가로 세로 열심히 셔터를 눌렀더니 나도 찍어주겠단다.

어찌저찌 전신 샷도 겟했다.


시선을 강탈하는 탑을 뒤로하고 다시 절 입구로 돌아갔다.

TV에서 보던 태국 괴물들이 절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황금탑 못지않게 화려했다.

얼굴도 상상이상으로 화려하게 험악했다.




용쓰네


절 입구 바로 앞에 향이 잔뜩 꽂힌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안방마님 자세로 앉은 석상이 번뇌로 가득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 여자분이 신발을 벗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는 향과 길거리에서 봤던 꽃장식이 들려 있었다.

기도할 때 쓰는 거였구나.

아침부터 왜들 그렇게 꽃장식을 팔았는지 이해되었다.


한 명, 두 명, 절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관광객이 빽빽이 들어찬 사원에서 정성스레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무슨 소원을 저리 애타게 빌고 있는 걸까.

한참 사람구경을 하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나는 좀…신나졌으면 좋겠다.”


갑자기 머리가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태국에 도착한 밤부터 절에 온 지금까지 신기한 척, 즐거운 척 애써온 내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용쓰네.”


그렇다.

황금탑이고 괴물상이고 사실은 하나도 안 신기하다.

지금껏 뭔가 환기되는 양, 느끼는 바가 있는 양,

열심히 종알댔지만 사실 무얼 봐도 즐겁지 않다.


마냥 다 재밌고 흥미로워 보이던 과거의 나는 사라졌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을 소진해버리고 지쳐 신음하는 내가 있을 뿐…

과거의 나를 어떻게 다시 불러올 수 있는지,

가능하긴 한건지 알 수 없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잘라갔다’,

‘사실 동물원의 사자는 닭장 속 닭일 뿐이었다’

고백하던 제제가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동심을 잃는 건가.

열정을 잃는 건가.

무미건조하게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이쪽 진로를 택한 건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축 늘어진 몸뚱아리가 한층 무겁게 느껴졌다.


외국에 오면 달라질까 했는데 역시나 별거 없구나.

바람 좀 쐰다고 없던 힘이 나진 않는 거야.

더 이상 예전처럼 밝고 긍정적인 내가 아니야.

영영 잃어버린 건지도 몰라.


아득해졌다.




괜찮아


우울우울열매를 먹은 듯 우울거리다 문득 상담사님 말씀이 생각났다.


‘잘못된 감정은 없어요.’

‘어떤 마음이 들든 괜찮아요.’


갑자기 억울해졌다.


신나지 않으면… 안돼?

뭘 해도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나고, 잔뜩 가라앉은 게 지금의 나인데…

그러면 안돼?

왜 나는 밝고 긍정적이어야만 하는 거야.

부정적일 수도 있지.

신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여기서까지 애써 밝은 척할 필요 없어.

정상인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할 필요 없어.

죽을 것 같은데 짜내고 짜내서 뭘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너 힘내지마.

힘 안내도 돼.

그냥 힘든 대로 있어도 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돼.

여기서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새삼 ‘괜찮아’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건네 본 지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괜찮아’에는 언제나 ‘근데…’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비난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함께했다.


해야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놓아도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었다.




'내려놓으러 왔구나.'


미친 사람처럼 ‘괜찮다’는 말을 수십 번 되뇌었다.

조금씩 온 몸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팽팽히 긴장해 있던 몸과 마음, 정신의 근육들이 천천히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힘이 풀리는 느낌이 너무 낯설었다.

평생을 힘주고 살아온 사람인 것처럼.


힘을 주지 않고 살아온 날이 있던가.

언제나 두 손을 꽉 쥐고 갖은 애를 쓰면서 살아왔다.

기를 쓰고 무언가 배우려 했고, 더 잘하려 했고, 성취하려 했다.

항상 불안했고 증명해야 했고 노력해야 했다.

매일 매일 나름의 전투를 치렀다.


‘힘내. 할 수 있어. 갓생 살자.’

‘멋지게, 폼나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살자. 후회 없이 살자.’

‘정신차려. 자기관리 해야지.’

‘이렇게 도태되는거야. 그래서 지는 거야.

‘왜 이렇게 게을러. 언제 시작할건데.’

‘왜 이렇게 못해. 지금 더 해야 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나를 채찍질하기에 바빴다.




진정한 휴식


휴식을 위한 휴식은 있었나.

생산적이지 않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놀 때도 무언가 배우려 했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려 했다.

TV나 유투브, 숏츠를 볼 때도 자기개발 영상만 봤다.

‘시간낭비 한다’는 느낌이 싫었다.


뭔가에 완전히 몰두했을 때만 잠시 잊혀질 뿐,

한번도 하던 것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놓아본 적이 없었다.

휴식은 언제나 다시 달리기 위한 충전이었다.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가족, 친구,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내가 바라는 나의 이미지로 비춰지기 위해 항상 억텐을 부리며 살아왔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 없어.

여기는 너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해야 하는 일도 없어.

괜찮아.

다 놓아도 돼.


너무 오랫동안 쥐고 살아서,

피가 통하지 않아 괴사되기 직전의 손을 겨우 펴낸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를 꽤나 자유분방한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학교도 내 맘대로,

여행도 내 맘대로,

직업도 내 맘대로,

사회나 남들이 어떻게 보든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것을 하면서 내 식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역이 다를 뿐,

사회나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의식하다 못해, 내 감정까지 통제하고 살았다.


긍정적인 사람이고 싶어서 긍정적인 감정만 가지려 애쓰고,

부정적인 감정은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고,

‘득 될거 없어’, ‘좋게 생각하자’ 짓누르고,

감정을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맞게 통제하려 드니 하루종일 애를 쓰고 살게 됐다.

그냥 부정적이면 부정적인대로,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걸.

왜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쓴 걸까?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힘 좀 빼고 살자.

물에 둥둥 떠다니듯이,

내 감정을 바꾸려들거나 애쓰지 말고,

노력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러 다니듯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

흘러 다니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_2023.01


또 보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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