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도피 여행기 4

설레임

by 아르미



P가 번아웃이 오면



될 대로 되라


이번 여행은 정말이지 시작부터 끝까지 심각하게 P스러웠다.

여행지 선택부터가 그랬다.

한달 여행지, 어디에 짱 박혀 있을까?

힐링 휴양지를 검색했다.

치앙마이라는 태국 도시 사진이 나왔다.

한적~하니 느낌이 왔다.

여기다 콜.

수도도 좀 궁금한데…

방콕으로 인-아웃해서 찍먹해보까?

검색한지 30분만에 방콕-인천 왕복 티켓을 질렀다.




여행의 목적


한달 유럽여행, 뉴질랜드 워홀 등…

혼자서 해외여행 가본 경험은 꽤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뭔가 달랐다.

어디에 가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고…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날 좀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어디든 좋으니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가서 죽은 듯 사라지고 싶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뭘 하고 싶어서 간다기 보다는 ‘떠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느낌이랄까.


여행지 선택이 수월했던 이유도 어디든 괜찮았기 때문이다.

떠날 수만 있다면,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그래서 여행 준비를 정말 개떡같이 했다.

뭘 하고 싶어야 어디에 뭐가 있는지 검색해보기라도 하지…

결국 계획 없이 가서,

그날 갈 곳을 그날 아침에 검색하는 극P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만의 마지노선


여자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닌다고 하면

‘무섭지 않냐, 위험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솔직히 혼자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ㅋㅋㅋ

크고 작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거나 당할 뻔한 적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을 당할 때마다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일 때문에 거동의 자유에 제한이 생긴다니 그럼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부르짖으며,

억까를 억까한다는 심정으로 더욱 나돌아다니는 동력 삼았다.


그렇게 위험을 경험 삼아 계속 다니다 보니 임기응변이랄지 대응력이 생겼고,

‘쎄한데…..?’

같은ㅋㅋㅋ 제3의 감각기관이 열렸다.


스스로를 지키는 노하우랄지 여행습관? 같은 것도 생기는데,

그중 하나가 ‘번화가 근처로 숙소를 예약해두는 것’이었다.


“벌써 10시네….”

처음 혼자 여행했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늦게까지 놀고 싶은데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10시였다.

알아서 통금시간을 만들게 된 달까…

그러다 우연히 번화가 근처로 숙소를 잡았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놀다가 집 들어가기 5분 컷이니까 ㅋㅋㅋ

또 밤이건 낮이건 사람이 많아서 시끄럽긴 해도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도미토리보다는 호텔


그리고 숙소만큼은 되도록 편하고 좋은 곳으로 잡았다.

잘 때 푹 쉬어야 잘 놀 수 있고,

무엇보다 일이 터졌을 때 도망칠 보루(?!)를 마련해두는 느낌이랄까ㅋㅋㅋ

심신안정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곤 하니까….

파리에서 리셉셔니스트가 마음에 든다며 방으로 찾아오는 사태ㅋㅋ를 경험한 뒤로는 숙소 선택에 신중해지기도 했다.


돈은 없는데 번화가에 좋은 호텔을 잡아야 하니 미리 발품을 팔아야 했다.

무료취소 가능한 숙박앱으로 좋은 호텔을 물색,

저렴한 가격으로 사전 예약을 해두는 것이다.

덕분에 호텔 예약을 하느라 태국 내 이동할 도시 정도는 정하고 떠날 수 있었다.




유심, 환전, 보험, 카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핸드폰이랑 돈만 있으면 거진 해결된다.
사고 나면 보험이 도와줄 거고,
외국에서 쓸 (교통카드 기능 있는)카드까지 만들어가면 베스트.
숙소에 유심, 환전, 보험, 카드까지 챙겼으니 (P기준) 할건 다 했다.
나머지는 미래의 나에게 토스^*^




갈 생각은 있는 거지…?


바쁘기도 했다.
한달 간 사라질 예정인 만큼 여행 전날까지 야근을 했다.
하지만 주말에는 좀… 짐을 쌀 법 하잖아?
왜 침대에만 누워있는 건데…
떠나는 것만으로도 나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
다른 과정은 전부 귀찮았다.


결국 떠나는 당일 새벽, 부랴부랴 한 달치 짐을 쌌다.
짐 싸니까 공항 갈 시간이네
출국 시간에 맞춰 겨우 공항에 도착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항에 도착하니 여행 자체가 귀찮아졌다.

여행을 가기도 전에 여행 가기 귀찮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 여행…가는 게 맞나?




이상해


벌써 지친 느낌,
필요 이상으로 냉소적이야.
비행기를 기다리며 낯설기 그지없는 나와 마주했다.
수차례 해왔던 여행이다.
이 위화감의 정체는 뭘까.
나는 지금 왜 이러는 걸까.

창 밖으로 하나 둘,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어딘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갔다.
떠나는 비행기를 그저 멍~ 하니,
바라보는 나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설레지 않는 구나.’




설레지 않는 여행


나에게 여행이란 설레임 그 자체였다.
가기 전의 기대감도 설레임,
갔을 때의 새로움도 설레임,
간 뒤의 여운도 설레임으로 남았다.
설렘으로 시작해 설렘으로 끝나,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것이 여행,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의 나는 설레는 법조차 잃어버렸다.

여행을 간 대도 감흥 한 톨 없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렇게 무엇 하나 감흥이 없으면…
앞으로는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걸까.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매고 나니,
복잡한 생각들이 잦아들었다.

이미 탔는데 어쩔거임?
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여행 말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조금이라도 멀쩡해져서 돌아오기를 소망해보자.

갖은 억텐을 끌어올리며,
김빠진 콜라를 콸콸 들이키듯 애써,
설레지 않는 여행을 떠났다.




내려놓는 법

또 보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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