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도피 여행기 9

영어는 거들 뿐

by 아르미





공연이 끝나고 리버와 함께 카오산로드 주변을 거닐었다.

비보잉 추는 사람들, 휘황찬란한 노점상, 시끌벅적한 거리 분위기에 녹아 들었다.

예열을 마치고 클럽존 ★카오산로드★에 입장했다.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드는 클럽에 앉았다.

춤추고 놀다가 리버가 인사했다.

“나는 내일 출근해야 해서 들어가야할 것 같아ㅠㅠ

재밌게 놀고 집까지 조심히 들어가~”

“응 잘가! 모레 봐!”


리버가 떠난 뒤 제일 핫해 보이는 클럽으로 갈아탔다.

“Come! Come! Follow me~!”

친절한 직원에게 낚여 따라갔더니 한자리 남은 테이블에 나를 앉혔다.

“자리가 없어서 합석해야 돼^*^”

여자2명에 남자3명, 5명 남짓 되었는데 전부 중국인에, 일행인 듯 보였다.

‘영어 더하면 현기증 날 거 같은데…’

탈출각을 재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맥주를 따라주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 (중국어)”

잔을 맞대길래 나도 냅다 부딪히면서 외쳤다.

“짠!!!!!”




영어는 거들 뿐


나는 영어회화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졸업 때문에 토익시험같은 거 강제로 치면서 기초 떼고,

워홀 가서 외국친구들이랑 놀다보니 나도 모르게 터득하게 된 주먹구구식 영어랄까.

집중해야 들리고 더듬더듬 이어 붙이는 수준이다.

이미 두 명의 외국인을 상대한 상황,

집중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감 떨어지면 되던 말도 안 되는데..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평소라면 집에 가거나 혼자 놀러갔을 타이밍…

그런데 이 사람들,

영어 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네?


나는 물론 직원이나 새로 합류한 사람들에게도 주구장창 중국어로만 말을 걸었다.

그러다 몰라주면 손짓발짓하고,

그래도 몰라주면 아는 영어단어 몇 개를 문장 속에 끼워 넣는 식으로 대화를 하는데 얼추 말이 통했다.

중국인이니까 영어 못하는 건 당연하잖아,

알아서 알아들어줘, 라는 식의 당당함이랄까.


무리지어 다니기에 가능한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중심주의라는 것의 여파일지도.

하지만 영어한마디 못해도 할 말 다하고,

당당하게 소통을 이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꽤나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진짜로 영어가 ‘도구’로서만 취급되고 있는 현장을 보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이 현장을 신선하게 보는 내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적당히 쓰지 뭐, 못 쓰겠으면 말고, 식으로 영어를 다루는 게 왜 이렇게 신선할까?
도구를 도구로 취급하는 것뿐인데.


언제부터였을까,

영어를 소통의 도구를 넘어서 자존심 충족의 도구로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멋져 보이는 도구, 뽐내는 도구, 지식수준을 보여주는 도구 같은 것으로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그래서 영어가 안되면 쭈그러들면서, 나 답게 소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방금 전 탈출각부터 쟀던 것처럼… 아예 소통의 기회를 단절해 버리기도 했다.

영어가 안된다고 소통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소통의 도구인 영어가 소통의 장벽이 되어버렸다.


‘그러고보니 외국인보다 한국인 앞에서 영어 할 때가 더 긴장됐어.

잘 말하다가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끼면 갑자기 얼어버리고..’

나를 평가할 것 같고, 못한다고 비웃을 것 같고…

그 순간 영어는 나에게 소통의 도구 정도가 아니었던 거다.

영어를 자존심 세우는 수단으로 여기면서,

쓸데없는 열등감이 생겨버렸다.


뉴질랜드 워홀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는 진~짜로 말이 안 통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겁도 없이 부딪혀 댔다.

덕분에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지금보다 훨씬 영어를 못했을 적에도, 소통하려는 진심만 있으면 통했다.


‘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야.

적당히 쓰고, 못 쓰겠으면 다른 도구 쓰면 되는 거지.

도구 좀 못쓴다고 부끄러워하고,

심지어 피하기까지 하는 건 목적을 잃는 거야.

영어라는 도구 좀 못쓴다고 소통하려는 목적을 포기하는 거라고.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나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해.

나와 네가 통하기를 바라는 거니까.

통하려고 쓰는 도구들 중 하나인 영어를 쓰는 거야.’


마음을 달리하니 눈앞의 중국사람들도 달리 보였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와도 이 사람들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여주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내 눈에 소통하려는 저 사람들의 진심이 보이는 것처럼,

저 사람들 눈에도 내 진심이 보일 거야.

영어가 안되면 손짓 발짓에 비언어적 표현 쓰고 번역기 돌리고 하면 되지.

저 사람들처럼 온갖 도구 다 써가면서 얘기하면 되지!

일단 나오는 대로 뱉어보자!!’


붕괴된 영어라 할지라도,

오늘 밤만큼은 이들과 함께 파워당당해져보기로 했다.




새벽의 객기


그렇게 되도 않는 영어를 주고받으면서 밤새 놀다가,

새벽 4시쯤 클럽을 나와 중식당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다양한 음식들이 조금 조금씩, 엄청 작은 접시에 나왔다.

빨간 연등에, 돌아가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까지,

중국영화 속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장소가 바뀌니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열심히 중국 음식을 소개해주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번역기를 돌리다가 적당히 동상이몽하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즐거우니까.

흥겨운 분위기에 절여져서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웃고, 마시고, 즐겁게 떠들었다.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날이 밝는 건가.

여긴 어디지.

지도를 보니 다행히 숙소 근처, 걸어갈만한 거리였다.

페이스북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또 보러와요 :)


#아르미 #일상영감 #힐링하기 #몸마음건강 #에세이작가 #에세이연재 #번아웃 #퇴사 #여행 #사회초년생 #도피여행 #해외여행 #혼자여행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