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도피 여행기 10

새벽의 객기

by 아르미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젊은 태국인 무리와 마주쳤다.

나처럼 밤새 놀다 집에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했더니 말을 걸어왔다.

“안녕! 어디서 왔어?”

“Korea!”

“우와 한국사람!!”

열심히 소근 대는데, 호의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호텔 어디야? 찾아갈 수 있어?”

“**호텔이라고 카오산로드 쪽에 있는데 혹시 알아?”

“아~ 이 길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돼!”

“긴가민가 했는데 맞게 가고 있었네ㅋㅋ 고마워~ 너희 만나서 다행이다!”

“우리도 한국사람 만나서 좋아! ㅋㅋㅋ”

“(한국말로) 고마워!!”

했더니 세상 천진난만하게 꺄르륵 웃어주었다.

문득 외국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 내가 이 맛에 여행을 좋아했지.'


한국에서의 나는 그리 넉살 좋은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부탁도 못하고 요청도 못하고.

그런데 외국에만 오면 달라졌다.

한국에서는 집주인한테 베란다 전등 고쳐달라는 소리도 못해서 없는 셈 치고 사는 사람이,

외국에만 오면 잘도 쉽게 부탁하고 의지했다.

그만큼 고마워지는 일도 쉽게, 많이, 생겼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와 도움으로 하루, 하루, 빚어냈다.

감사한 하루가 더해질수록 내가 존재만으로도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축복을 다 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자존감이 충만해져서 돌아갔다.


여행 중에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부족해도 괜찮고, 몰라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여기서 나는 모든 게 처음이니까.

오늘처럼 잘 어울려서 놀고, 길도 잘 찾고,

일상만 잘 살아내도 너~무 쉽게 내가 대견해진다.

여기서는 뭐든 당연하지 않으니까.

딴 세상에 떨어져도 잘 살아내는 나를 보면서,

무엇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딱, 지금처럼!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데다,

번아웃에 우울증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잔뜩 쭈그러져 있던 나에게 실로 오랜만에 찾아 든 감정이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파 같은 속사정


'차갑다.'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걸으니 머리까지 차분해졌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활력이다.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보도록 하자.


지금 내 문제가, 뭐지?

일단 몸이 아파. 머리도 아파.

뇌 자체가 아픈 것 같기도 해.

대부분 내 정신이 아닌 거 같아. 너무 쉽게 화가 나.

그냥 다 힘들어.


너무 문제가 많잖아 …ㅋㅋㅋ

제일 심각한 것부터 가자.

제일 힘든 게 뭐야?

그냥 뭐든...할 힘이 없어. 재미도 없어.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게 없어.

왜 사는지 모르겠어.

머리로 아무리 동기부여해도 몸이 안 움직여.


번아웃이라…

너무 무리해서 지친 걸까?

그냥 지치기만 한 거라면, 푹 쉬면 다 해결될 거야.

이렇게 푹 쉬고 나면 모든 게 해결될까?


아닐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지쳤다는 느낌 외에 드는 감정이 있나?


갑갑해.

그냥 지친 거라면 지친 느낌만 들어야 하는데 뭔가, 답답해.

사는 게 답답해.

뭔가 꽉 막힌 것 같고, 항상 참고 있는 느낌이 들어.


내가 뭘 참고 있지?

진로도 인생도 욕심껏,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뭘 참으면서 살고 있는 거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 도리가 있나…


답을 모르겠다,

는 답에 도달했다.

드넓은 허허벌판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이정표도, 길이 난 자국도 없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안전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쫓아갈 길이 없으니까.

고로 어느 쪽으로 가든, 괜찮다.

쫓아갈 길이 없으니까.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오면 절망적일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막막함과 동시에 해방감이 일었다.

게다가 마주한 벌판이 꽤나 익숙했다.


그렇구나.

애초에 나는,

답을 알고 산 적이 별로 없구나.








또 보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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