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객기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젊은 태국인 무리와 마주쳤다.
나처럼 밤새 놀다 집에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했더니 말을 걸어왔다.
“안녕! 어디서 왔어?”
“Korea!”
“우와 한국사람!!”
열심히 소근 대는데, 호의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호텔 어디야? 찾아갈 수 있어?”
“**호텔이라고 카오산로드 쪽에 있는데 혹시 알아?”
“아~ 이 길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돼!”
“긴가민가 했는데 맞게 가고 있었네ㅋㅋ 고마워~ 너희 만나서 다행이다!”
“우리도 한국사람 만나서 좋아! ㅋㅋㅋ”
“(한국말로) 고마워!!”
했더니 세상 천진난만하게 꺄르륵 웃어주었다.
문득 외국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 내가 이 맛에 여행을 좋아했지.'
한국에서의 나는 그리 넉살 좋은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부탁도 못하고 요청도 못하고.
그런데 외국에만 오면 달라졌다.
한국에서는 집주인한테 베란다 전등 고쳐달라는 소리도 못해서 없는 셈 치고 사는 사람이,
외국에만 오면 잘도 쉽게 부탁하고 의지했다.
그만큼 고마워지는 일도 쉽게, 많이, 생겼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와 도움으로 하루, 하루, 빚어냈다.
감사한 하루가 더해질수록 내가 존재만으로도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축복을 다 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자존감이 충만해져서 돌아갔다.
여행 중에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부족해도 괜찮고, 몰라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여기서 나는 모든 게 처음이니까.
오늘처럼 잘 어울려서 놀고, 길도 잘 찾고,
일상만 잘 살아내도 너~무 쉽게 내가 대견해진다.
여기서는 뭐든 당연하지 않으니까.
딴 세상에 떨어져도 잘 살아내는 나를 보면서,
무엇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딱, 지금처럼!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데다,
번아웃에 우울증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잔뜩 쭈그러져 있던 나에게 실로 오랜만에 찾아 든 감정이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갑다.'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걸으니 머리까지 차분해졌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활력이다.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보도록 하자.
지금 내 문제가, 뭐지?
일단 몸이 아파. 머리도 아파.
뇌 자체가 아픈 것 같기도 해.
대부분 내 정신이 아닌 거 같아. 너무 쉽게 화가 나.
그냥 다 힘들어.
너무 문제가 많잖아 …ㅋㅋㅋ
제일 심각한 것부터 가자.
제일 힘든 게 뭐야?
그냥 뭐든...할 힘이 없어. 재미도 없어.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게 없어.
왜 사는지 모르겠어.
머리로 아무리 동기부여해도 몸이 안 움직여.
번아웃이라…
너무 무리해서 지친 걸까?
그냥 지치기만 한 거라면, 푹 쉬면 다 해결될 거야.
이렇게 푹 쉬고 나면 모든 게 해결될까?
…
아닐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지쳤다는 느낌 외에 드는 감정이 있나?
갑갑해.
그냥 지친 거라면 지친 느낌만 들어야 하는데 뭔가, 답답해.
사는 게 답답해.
뭔가 꽉 막힌 것 같고, 항상 참고 있는 느낌이 들어.
내가 뭘 참고 있지?
진로도 인생도 욕심껏,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뭘 참으면서 살고 있는 거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 도리가 있나…
답을 모르겠다,
는 답에 도달했다.
드넓은 허허벌판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이정표도, 길이 난 자국도 없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안전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쫓아갈 길이 없으니까.
고로 어느 쪽으로 가든, 괜찮다.
쫓아갈 길이 없으니까.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오면 절망적일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막막함과 동시에 해방감이 일었다.
게다가 마주한 벌판이 꽤나 익숙했다.
그렇구나.
애초에 나는,
답을 알고 산 적이 별로 없구나.
또 보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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