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1순위인 사람의 기록: 8화

밝힐 수 없는 관계

by 상온

뭐가 계기였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회사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조금 느슨해져서였을까.

그냥 익숙함이 다시 불을 붙인 걸지도.


어쨌든 우리는 다시 시작됐다.


우리는 다시 술을 먹고 선을 넘었다. 그리고 전과 다른 관계가 시작됐다.

매주말을 함께 보냈고 매일 대화를 나눴다.

이번엔 다르고 싶었다. 나는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자주 표현했고, 너의 표현도 자꾸 확인했다.

다행히 너는 점점 다정해졌고 우리는 남들 같은 연인이 됐다.

데이트도 해보고, 제주도도 가고, 결혼 얘기도 했다.

솔직히 즐겁고 행복했다.


근데 내 안에서는 계속 '그때'가 걸렸다. 너의 바람.

그 당시의 일은 금기처럼 꺼내기 어려웠다.


지금이 좋을수록 죄책감이 올라왔고, 너에 대한 불신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또 똑같이 끝날까 봐 불안했다.


그러던 중 새로운 프로젝트로 힘들어하던 네가 나한테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 둘 다 일 좋아하니까, 일이 먼저일 수 있다는 건 알았다.


근데 현실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의 스트레스 해소가 2순위, 너의 체력을 위한 잠이 3순위.

나는 계속 뒤로 밀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의무적인 메시지만 오갔다.

이해는 했지만 마음은 달랐다.


나는 같은 상황이 올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고, 이번엔 얘기를 하기로 했다.

지쳤다고 말했고 대화를 신청했다.

너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웃긴 건, 나는 이 패턴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다.

“알겠어” 다음에 오는 조용함. 그 조용함이 내 안에서 뭘 무너뜨리는지도.


그래서 이번엔 더 이상 '기다려보자'가 아니라 '여기서 멈추자'가 먼저 떠올랐다.

연락을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원했던 대로 끝냈다.

근데 막상 끝내고 나니 잡생각만 남았다.

너는 내가 너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는 상처받을 때마다,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진다.


나는 사랑이 1순위인 사람이다.

근데 사랑이 1순위라고 해서, 늘 내 마음이 향하는 쪽을 택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사랑 말고 다른 걸 택했다.

기다리지 않는 쪽, 애매하게 남지 않는 쪽, 혼자만 납득하려 애쓰지 않는 쪽. 죄스럽지 않은 쪽.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죄책감과 불신으로 나를 갉아먹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이 뭔지는 아직 정리 중이다. 다만 지금은, 내가 뭘 견딜 수 있고 뭘 못 견디는지 정도는 알 것 같다.



https://brunch.co.kr/@anna30/7


작가의 이전글사랑이 1순위인 사람의 기록: 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