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의 문제
두 달 동안 지냈던 영등포 오피스텔은 사실 최악이었다. 하수구에서 자꾸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올라와 내내 향을 피워야 했고 그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살면서 한 번도 눌리지 않았던 가위가 눌렸다. 나는 귀신을 느낀다거나 본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자꾸 이상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햇볕이 쨍쨍하게 드는 우리의 신혼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신혼집은 도배를 해야 했고 싱크대 필름을 다시 붙여야 했다. 부모님은 화장실도 수리하고 들어가라 하셨지만 승현이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하여 그냥 넘어갔다. 벽지와 싱크대 필름은 승현이 원하는 대로 온통 흰색으로 골랐다. 나는 조금은 어둡고 아늑한 느낌의 벽지로 고르고 싶었지만 승현은 흰색으로 해야 집이 넓어 보일 거라 했다. 그러기로 했다.
가구는 같이 보러 갈 시간이 없어 승현이 알아서 다 골랐다. 난 따뜻한 느낌의 원목을 좋아한다고 분명 말한 것 같은데 승현은 죄다 하얗고 단출한 걸 골라왔다. 서로의 취향이 무척 달랐다.
드디어 이삿날이 왔다. 새 살림살이와 각자 살던 짐들이 들어오니 집이 꽉 찼다. 옷방은 반을 갈라 승현과 나의 옷을 각각 두기로 했고 수납장도 각자의 영역을 정해 물건을 넣기로 했다. 서재방은 내 공간이라고 승현은 말하며 뿌듯해했다. 작가 아내에게 서재방을 선물해 준 자신이 스스로 장했던 모양이다.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친정집에 두고 온 책들을 몽땅 가져올 생각에 잠깐 신이 났다. 그런데 승현은 서재방 책장에 자신이 받은 트로피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 액자들도 진열해놓았다. 내 책은 구석으로 몰렸고 친정집에 두고 온 수십 권의 책들이 들어올 자린 없었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내가 오래전 학원을 다니며 그린 유화 그림이 없었다. 또 종종 운동할 때 쓰던 스텝퍼가 없었다. 난 이사 도중 분실한 거라 생각했다. 승현에게 말하니 자기가 수납장에 넣어두었다 했다. 왜...? 무슨 권리로...? 나는 그것들을 다시 꺼내오라 해 승현의 트로피 옆에 내 그림을 두었다. 그리고 스텝퍼를 텔레비전 앞에 두었다. 그런데도 승현은 틈만 나면 스텝퍼를 수납장에 넣었다가 구석으로 치웠다가 안절부절못했다. 스텝퍼가 뭐라고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혼자 살던 오피스텔에서 승현과 함께 지낼 때 승현은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건도 내가 두는대로 그대로 두었으며 매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난 그게 그 사람의 본 성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그 공간은 내 영역이었기 때문에 건들지 않은 것이었다. 승현은 신혼집에 들어온 후 매일 물건을 자기 맘대로 옮기고 치워버렸다. 특히 내 물건은 더 구석으로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내 귀여운 라인 캐릭터 초코 인형은 어딘가에 낑겨 넣어버리고 보기만 해도 무서운 스타워즈 츄바카 인형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나는 질세라 츄바카 인형을 치우고 초코 인형을 다시 올려놓았다. 한동안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우린 영역 싸움을 했다.
승현은 아마 본인이 마련한 첫 집이라 더 애착이 갔을 것이다. 옥탑방 살면서 꿈꿔왔던 로망의 집, 온통 하얗고 자신의 트로피와 사진 액자와 츄바카가 가득한 공간, 그렇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기분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내가 세 들어 사는 기분으로 살 순 없었다. 난 참다 참다 서운한 기분을 토로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 너의 집이냐, 우리의 집이냐 한바탕 따져 묻고 내 물건을 마음대로 치우지 않겠는 약속을 받아냈던 거 같다. 승현은 그러겠다고 순순히 약속했지만 이후로도 종종 내 물건을 옮겼다. 그러려니 하고 산다. 살다 보니 이 정도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