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할머니
마흔 살 승현과 서른일곱 살 내가 조금은 늦은 결혼식을 올릴 때, 우린 식장에 조부모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많이 생각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성장하는 동안 정말 귀한 마음을 쏟아주셔서 사랑이 많은 아이로 클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거의 내 단짝 친구였다. 학교에서 다녀오면 반겨주는 건 할아버지였고 이후 잠들 때까지 티격태격하며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마루인형을 갖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말을 잘 들을 때마다 문구점에 가서 마루인형 옷을 하나씩 사주셨다. 친구들과 냉면을 드시러 갈 때도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삶은 달걀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친구들 냉면 위 삶은 달걀을 걷어 나에게 주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찐 손녀바보였다. 외출하면 꼭 내가 먹을 삼베 과자를 사 가지고 오셨다. 어린 나이에 삼베 과자가 맛있을 리 없어 안 먹으려고 버티곤 했다. 할아버지는 쫓아다니며 한 입만 먹어보라고 하셨고 내가 결국 한 입 물면 맛있지? 물으며 웃으셨던 얼굴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그때도 병원 야경이 좋다며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그 야경이 뭐라고... 아픈 와중에 손녀에게 기어코 야경을 보여주곤 뿌듯해하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항상 가슴 아파하셨다. 내가 두세 살쯤 되었을 때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가 다림질을 하다 전화를 받으러 거실로 나가셨을 때 내가 그 다리미에 손등을 덴 것이다.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그 일로 손등 전체에 엉덩이 살을 떼어 이식해야 했고 상처가 크게 생겼다. 어린 나이부터 있던 상처라 나는 그게 콤플렉스도 뭐도 아닌데 할머니는 항상 내 손을 붙잡고 미안해하셨다. 그땐 할머니가 왜 저러시지 어리둥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손등의 상처보다 더 크게 할머니의 마음은 데었을 거다. 그 상처는 아물지도 않고 내내 괴로우셨을 거다. 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초반에 할머니는 내가 스무 살 후반에 돌아가셨다.
승현은 종종 할머니 얘기를 했다. 광산 김 씨 패밀리 10남매를 낳으신 승현의 할머니는 승현을 볼 때마다 우리 집안에선 나올 수 없는 인물이라며 유독 예뻐하셨다고 한다. 승현과 동생은 착하기도 착했다고 한다. 둘이 싸우는 법도 없었고 살던 동네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다른 애들은 다 감을 따먹는데도 승현과 동생은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형편은 어려웠어도 어머님이 곧게 정성스레 키우신 덕분이었다. 승현의 할머니가 노쇠하셔서 임종을 준비해야 할 때 10남매 중 둘째 며느리인 어머님이 자처해서 모셨다고 한다. 꼼짝도 못 하시는 승현의 할머니를 위해 어머님은 똥오줌을 다 받아내셨고 곡기를 끊으시려고 안 드시는 것도 모르고 약국을 전전하며 입맛 도는 약을 구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그렇게 몇 해 전 승현의 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승현은 많이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다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결혼까지 하는데... 그것만 보시고 가셨으면 좋았을 걸 불효만 한 거 같아 죄송하다고 했다. 어머님도 승현의 할머니 얘기를 많이 하신다. 친정 엄마가 없으신 어머님껜 시어머니가 엄마와 다름없었던 것 같다.
결혼식을 올리기 한 달 전, 나는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을 승현과 함께 찾았다. 평생을 단정하게 사신 우리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보면 미스코리아를 나가라고 했지만 본인 딸인 우리 엄마보단 내가 인물이 못하다고 하셨다. 여름이면 직접 콩을 갈아 면포에 건더기를 걸러 곱고 부드러운 콩국수를 해주셨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콩국수가 아직도 제일 맛있다. 할머니가 아프신 이후로 엄마가 그 맛을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외할머니의 맛은 외할머니만 낼 수 있는 건가 보다. 외할머니는 그즈음 정신이 많이 흐릿하셨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고 곡기를 끊으셨지만 요양사들은 살리는 게 일이라 링거를 꽂고 외할머니의 생명을 유지시켰다. 외할머니는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시곤 했는데 정윤이라고 말씀드리면 결혼은 했냐고 묻곤 하셨다. 아직 못했다고 하면 어쩌냐며 속상해하셨다. 그리고 내가 가고 나면 같이 머무는 할머니들에게 또 요양사들에게 우리 손녀 남자 좀 소개해주라고 중매에 나서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이 능사는 아니지만 외할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거 같아서...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승현을 본 외할머니는 많이 어리둥절해하셨다. 엄마는 큰 소리로 정윤이 신랑이라고 말씀드렸다. 눈을 껌뻑 껌뻑 승현을 찬찬히 보시곤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던 거 같다. 병실로 올라가는 길에 엄마에게 저렇게 잘 생겨서 정윤이 속 썩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은 착해 보인다고 덧붙이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시기에 결혼식엔 오시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봄, 코로나로 면회도 자유롭지 못할 때 숨을 거두셨다. 하늘나라로 가시는 길 손주들 한 명 한 명 생각하시다가 그래도 정윤이가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시고 가셨기를.
조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은 지금도 내 큰 자랑이고 자산이다. 옆에 계시진 않아도 누구보다 든든한 내 백이다. 날 하염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