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없다
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말에 승현은 의외로 세게 나왔다. 장 작가를 속상하게 하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지만 장 작가가 나가겠다면 할 수 없지요, 이런 식의 답변이 왔다. 할 수 없지요... 할 수 없지요?? 나가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내가 집을 나가겠다 선포한 건 날 붙잡고 이제 그만 항복하라는 말인데... 할 수 없다니? 이 사람은 여자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인 건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척하는 고수란 말인가. 이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승현은 내가 그다지 유순하지 않으며 한다면 하는 여자라는 걸 깨닫지 못한 듯싶었다. 하긴 나도 그렇다. 연애할 땐 이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했구나 싶었다. 연애 8개월 만에 결혼이라니, 내가 미쳤지 이마를 종종 쳤다. 승현과 대화하며 난 우리가 좀 더 연애를 했다면 헤어졌을 거 같다고 말하자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절대 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언젠가 엄마에게 승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하자 엄마는 남편이라는 사람은 안다 싶으면 모르겠고 또 알겠다 싶으면 모르는 평생 알 수 없는 존재라 말했다. 또 남편에 대해 100프로를 알 필요도 없고 딱 30프로 정도 알고 사는 게 적당한 거라 말했다. 그땐 그게 말이 되냐고, 우리는 부부인데라고 반박했으나 지금은 그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쨌든 승현이 붙잡지 않았기에 나는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멀리 갈 엄두는 나지 않고 집 근처 우리가 결혼했던 호텔의 방을 잡았다. 첫 부부싸움을 하고 온 곳이 결혼했던 곳이라니. 그때는 그토록 행복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불행하지? 호텔방에 가니 뷰도 좋고 욕조도 좋았지만 혼자인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읽겠다고 들고 간 책을 펼쳐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다 재미없었다. 슬픈 기분이 들었다. 승현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냥 집에 들어갈까 잠깐 망설였지만 기선제압에서 지고 싶진 않았다. 혼자 이를 갈았다. 승현의 전화나 문자를 다 씹을 것이며 이틀에서 삼일 정도는 애태워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도 연락을 기다렸는데 승현은 연락 한번 해오지 않았다. 연락이 와야 통쾌하게 씹어 줄텐데 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 듯싶었다.
나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친구도 집에 있던 터라 바로 와주었다. 친구가 사 온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고 마시며 분위기를 내보았다. 술이 좀 오르자 친구에게 승현과 싸운 이유를 말했다. 나도 종종 친구들의 한탄을 듣지만 솔직히 아주 큰 잘못이 아니고서는 남의 남편 얘기는 다 귀엽다. 거기에 화내는 친구들도 너무 귀엽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싸움 스토리를 들은 친구는 승현을 욕하지도 못하고 내 편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표정이었다. 난 밤새 승현을 욕했다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가 어떻게 연락 한 번 없을 수 있냐고 분노했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친구는 왔다 갔다 하는 날 위해 같이 있어주었다.
그러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는데 승현이 밤사이 피드를 두 개나 올렸다. 그 피드는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우리 집에 친구를 불러 술을 마시고 있는 사진, 그리고 친구가 춤을 추는 동영상을 올린 것이다. 내가 집을 나갔는데, 친구를 집에 불러서 놀아? 나한텐 연락 한 번 없고? 나는 잠깐 이 사람하고 계속 살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조금 울다가 다시 잠들었다. 나는 2~3일 집에 안 들어갈 생각이었으므로 짐도 꽤 챙겨 왔고 호텔방도 이틀 잡았지만 그냥 체크아웃하고 집에 들어갔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그에게 내가 없는 자유를 허락할 수 없었기에.
승현은 스케줄이 있어 저녁 늦게야 들어왔다. 승현은 나를 보더니 그냥 안아주었다. 나는 싫은척하면서 밀쳐냈지만 허무하게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래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 건가? 그리곤 바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알콩달콩한 우리로 돌아갔다. 기선제압의 승자는 없었다. 그리고 지나고 보니 부부 사이에 기선제압 같은 건 필요도 없는 거였다. 이후 우리는 종종 부부싸움을 했는데 그 끝은 늘 시답지 않게 끝나고 다시 행복해졌다. 부부싸움은 의외로 많은 것을 남긴다. 싸우면서 승현을 알아가고 그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또 내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 승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힌트를 얻었다. 한 번 삐끗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이랑 가족이 된다는 건 바닥을 닦는 것과 비슷하다고. 닦을 때마다 매일 안 보이던 흠들이 보이고 그래서 지우고 덮고 더 열심히 닦는다고. 흠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40년 가까이 따로 살다가 만난 승현과 나는 지금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도 우린 서로 기꺼이 서로의 흠을 덮고 닦아 줄 마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승자의 기분을 느껴도 되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