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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24. 2019

내 인생의 세 남자

아빠, 오라버니 그리고 남편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내 인생에서 중요한 세 명의 남자를 꼽으라면

나는 일초의 망설임 없이 이 셋을 고를 것이다.


아빠, 오라버니 그리고 남편





우리 집은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열린 분위기의 가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나하나 크게 잔소리하거나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규율에 대한 교육이 보다 앞선 곳이었다.


아빠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몸을 길러주셨다.

가장으로서 밖에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벌어

밥을 먹이고, 교육을 시키고, 옷을 사 입혔다.


어린 시절의 아빠는 그래도 꽤 다정다감한 분이셨는데

중학교 시절, 나에게 2차 성징이 찾아왔을 때부터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종종 아빠랑 싸우기도 하고 반항을 한다고 따귀를 맞아본 적도 있었다.

10대 후반을 지날수록 아빠가 미웠다. 

다른 집 아빠들도 그러려니, 딸이랑은 원래 안 친해. 라며

그저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기며 지내는 시절도 있었다.


20대 초반, 대학생-취업준비생 시절 우리는 정말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아빠는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법한 대기업에서 25년 정도 근무하셨다.

젊은 시절 당시 30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기업으로 입사한 아빠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세고 본인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분이었다.

아빠가 함께 일하는 젊은 일꾼들은 모두 일류대 출신이었다.

그에 비해 딸은 학벌도 취업에 대한 노력, 열망도 그다지 그의 성에 차지 않았었다.

나를 보면 답답했었나 보다.


아빠는 언니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퇴사하셨다.

25년 직장생활 마지막 날은 허무하게도 종이박스 하나로 정리되었고

아빠에게 찾아온 것은 성취감이 아닌 무기력이었다.

그리고 곧 아빠는 우울증에 가까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아빠를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2차 성장기는 아빠가 중간관리자가 되던 시기 즈음이었고

승진에 대한 압박과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우리에게서 다정한 아빠의 모습을 앗아갔다.

삶의 무게는 가장의 어깨를 짓눌렀고 가족들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나의 취업준비생 기간은

아빠가 그곳에서 정말 힘겹게 버티는 시간이었으며

우리의 대학 졸업과 함께 희망퇴직을 신청한 것은

대학생 딸 두 명의 등록금 숙제가 끝났다는 의미였음을 나는 이제야 안다.


50대 후반의 아빠는 노량진 학원에 책가방을 매고 등원을 시작했다.

공부 끝에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아파트 관리소장님으로 근무하신다.


유명한 대기업에 다니던 연봉 높은 아빠보다 아파트 관리소장님의 지금 아빠가 더 따뜻하다.

세탁소 사장님과 이야기하고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드시고

주민들과 오가며 반갑게 인사하는 아빠의 삶은 우리의 거리를 꽤나 많이 좁혀놓았다.


그리고 더불어

만약 아빠가 스스로 대기업 직장인 삶의 허무함과 무기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겠다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을지

땀냄새나는 기술자 사위를 이렇게 아끼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인생은 경험하는 만큼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환경이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나의 아빠를 보며 항상 느낀다.






오라버니는  나의 머리를 채워준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오빠에 버금가는 사촌오빠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의 학생이던 오빠는 고 3 시절 나의 수학 과외선생님이었다.

우리 집에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을 때 과외비도 받지 못했지만 자주 와서 나를 봐주었다.


오빠는 똑똑한 만큼 특이한 사람이었다.

공식을 외워 문제풀이를 반복하게 하는 기존의 학원 강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미적 함수의 증명을 설명해주었다.

원리를 알게 해 주는 게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빠가 가고 나서 종종 답안지의 해설을 찾아보면 그의 설명 방법과 전혀 달랐다.


언젠가 하루는 오빠가 오자마자 나에게 "이 문제를 풀어봐."라고 하고

내 침대에 기대서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깔깔거린 날이 있었다.

끙끙 앓으며 못 풀겠다고 하자 "넌 이미 어떻게 푸는지 다 알고 있다."라며 그저 책 읽기를 이어갔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겨우 한 문제를 풀고 나자 "잘했다."라고 하며 유유히 그는 우리 집을 떠났다.

그 날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겨우 그 한 문제를 풀었지만 그 이후 수학 성적은 매우 월등히 상승했다.


나는 모의고사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수학 최고점을 수능 시험날에 받았고,

가채점을 하자마자 아빠보다 먼저 오빠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렸다.

할 수 있을 거라며 나를 믿고 기다려준 내 인생의 첫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생이던 오빠는 직장인이 되었다.

오빠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대기업에 근무한 후 미국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나중에 치킨을 튀기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오빠는 미국으로 떠났지만 메일과 메신저로 자주 연락했고

머리가 점점 커지는 나에게 필요한 지식과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말들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매일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자.

- 멋진 척을 하다 보면 정말 멋진 사람이 된다.

- 행복을 좇으려 하지 말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에게도 고민을 말할 수 없던 힘든 밤에는 지구 반대편의 낮을 살고 있는 오빠에게 전화해서 

"왜 나에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내가 정말 문제일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멍청한 질문을 하며 엉엉 통곡을 하기도 했다.


말없이 들어주던 오빠는

"니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너라면 지금같이 하지 못했을 거야."라고 답해주었다.

되려 오빠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날 그가 나에게 준 위안은

내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직장인이던 26살 나의 생일에는

'멋진 아가씨라면 Edith Piaf를 들을 줄 알아야지.' 라며

회사로 그녀의 CD와 카드를 보내주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사촌 오빠가 없다는 것은 이때쯤부터 안 것 같다.

오빠뿐만 아니라 사촌언니와도 거의 친자매처럼 지내기에

다른 사람들도 사촌들과 이렇게 지내는 줄 알았다.- 


내가 해외여행을 처음 간 곳도 오빠가 있던 뉴욕이었고

외국에 나가 살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 것도 오빠로 인해서였고

-오빠가 외국에 나가 공부를 더 하라는 조언을 자주 했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오빠와 함께 여행 중이던 제주에서였다.


27살 뉴욕 한 펍에서 오빠를 만나 울었던 날이 생각난다.

"오빠 우리가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오빠 결혼, 나 결혼, 큰 엄마 큰 아빠 돌아가시고, 우리 아빠 돌아가시고

이래저래 해도 열 번이 다 안될 것 같은데..."라며 바보같이.

오빠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는 나에게 너무 중요한 사람, 좋은 선생님이었고,

인생 큰 굴곡점마다 항상 오빠가 있었고, 

언제나 고마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낯선 타지 생활을 직접 경험해보니

유학시절 힘들고 외로웠을 오빠의 생활이 공감되며

나에게 공유해주었던 그의 마음과 시간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오빠는 미국에서, 나는 호주에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며 멀리 살고 있고 예전같이 자주 연락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오빠가 마음에 있어 자랑스럽고 든든하고 감사하다.


나이 먹어 종종 얼굴 보며 지낼 수 있게 지금을 열심히 살아내야겠다.






쓰기 전부터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나의 남편 이야기이다.

남편은 텅 비어있던 나의 마음을 채워준 사람이다.


내가 겪어낸 모든 일들은 결국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그 시간들을 통과한 나이기에 남편을 만났을 때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 믿게 하는 사람.


나는 그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가 불안한 눈빛으로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 

뒤에서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라고 안심시켜주는 보호자.

그래서 아기는 또 앞으로 한 걸음발을 옮길 수 있다.

세상 가장 소중한 나의 지지자. 언제나 내편. 내가 돌아갈 곳.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많은 곳에서 살던 나에게 그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를 수도 없이 이야기해주었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화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꾸미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빨리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없어도 괜찮아요.


다 괜찮다고 했다.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하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다만 그 책임은 우리가 함께 지는 거라고.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욕심 내도 된다고.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언젠가 다 이루게 된다고.


부인 밥하고 청소하는 사람 아니라고.


그가 사는 세상은 그의 언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뭐든 다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고,

나를 그의 세상에 초대해주어 나도 함께 뭐든 가능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을 알게 하고

의무감보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사람.


입 밖으로 쉬이 내뱉는 조언보다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


유쾌하지만 선을 넘지 않고,

욕심내는 만큼 노력하고,

진지하지만 명료하고, 

자신에게만 인색한,

나의 남편.


좋은 인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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