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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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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30. 2019

남편의 아버지

우주의 인연. 아빠 같은 아빠.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남편과 호주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 중에 하나는

대구에 계신 시부모님께 인사를 가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 없었지만 혼자라도 가서 뵙고 싶었다.

그게 당연한 예의였고 어떤 분들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두 손 바리 선물을 들고 혼자 씩씩하게 대구행 KTX에 올라탔다.


어머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주셨는데

사실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어떤 대화를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 나의 마음에 가장 남았던 것은 아버님 말씀과 눈빛이었다.


"아빠는 며느리가 와서 행복하다. 너무 좋은 날이에요."

라며 소주를 한 잔 들이켜시고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지금 이렇게 인연이 되어 그 우주가 만나게 된 거야.

그렇지만 서로의 우주를 존중해준다면 너무 좋겠지." 


아버님은 눈빛이 빛나고 미소를 머금으신 포근한 분이셨다.

내가 말을 할 적마다

한 번도 끊지 않으시고 눈을 맞추며 끝까지 다 들어주셨다.


아버님을 그대로 닮은 게 남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50대는 이렇겠구나.' 너무 쉽게 상상이 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것에 대해 확신과 안도감이 생겼다.

혼자라도 찾아가 부모님을 뵌 것에 대해 잘했다고 스스로 몇 번을 되뇌었다.


결혼 후에도 내 생일 축하는 아버님이 1등일 때가 많았고,

언제나 애기라는 호칭 뒤에 하트를 달아 메시지를 주셨고,

-아들은 평생 하트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예쁘다. 수고했다. 사랑한다. 응원한다. 기도한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라. 아빠가 있잖아.라고 힘을 주셨다.


시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며느리였던 나는 항상 감사했고 따뜻했다. 




그런 아버님께서 작년 겨울 소천하셨다.


단순 감기인 줄 알고 약국 약으로 버티시다가 

너무나도 심해진 기침 앞에 결국 응급실을 찾아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가족들은 타지에 나와있는 우리에게 처음 며칠은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님의 경과가 매우 좋지 않아서

의사 선생님이 외국에 있는 아들에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권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너무 놀란 나는 듣자마자 울어버렸지만

애써 숨을 고르고 눈물을 참던 남편은 용기 내어 아버님과 통화를 시도했다.


입원실에 누워계시던 아버님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빠. 내가 아빠 보러 빨리 갈게." 남편이 말하자

"뭐하러 와 지금. 아빠 좀 괜찮아지면 그때 와."라고 대답하셨다.

"아빠 보고 싶으니까 가는 거지."라는 남편의 말 뒤로 눈물을 참고 있는 거친 숨이 따라왔다.


우리는 그날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발권했다.

연말이라 항공권이 없을까 마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한 번의 경유로 갈 수 있는 티켓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다음 날 바로 출발해 이튿날 오후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최대한 빨리 내려오라고.


예상치 못한 긴급상황이었다.


최대한 서둘러 가족들을 만나고자 한국에 갔던 이유는

앞으로의 치료방법이나 상황들을 같이 상의하고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빨리 내려오라니.


마음이 무너져버리는 것 같았지만

나보다 남편이 더 힘들 것을 알기에

그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호주의 한여름에서 한국의 한 겨울로 간 우리는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새를 바꿀 틈도 없이

금요일 저녁 만석의 KTX에 입석으로 꾸역꾸역 몸을 싣어넣고 넣고 대구로 향했다.


남편은 이미 넋이 많이 나가 있는 상태였고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동대구 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아버님이 계신 병원 로비에 도착하니

작은 아버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남편은 몇 년 만에 작은 아버님을 만나뵈고도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를 닮은 작은 아버지를 뵌 것만으로도 꾸역꾸역 참고있던 마음이 울컥 올라왔던 것인지

그의 눈동자와 손이 바르르 떨려오는 것을 보았다.

작은 아버님은 남편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토닥이셨다.

"너무 놀래지 마라. 괜찮다. 마음 가라앉히고. 괜찮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버님께서는 간호사 스테이션에 계셨다.

너무 위독했기에 병실에 있을 수 없으셨고,

호흡기와 혈압약에 의존한 채 몇 시간을 버티며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그 좁은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자 그 곳에 계신던 분들이 자리를 비켜주셨다.

"아들, 며느리 왔네."

"기다리느라 애썼네."

"아들 보고 싶어했잖아."

"아빠 본다고 애들이 그 멀리서 달려왔는데 눈 좀 떠보세요."


눈을 뜨지 못하시는 아버님께 다가가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아버님 가슴에 머리를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흐느껴 울었다.

숨이 가빠 제대로 숨 쉬지 못하며 계속 울었다.


"아빠. 내가 왔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아빠. 아빠.

 이렇게 눈도 못 마주칠 거면서 왜 오지 말라고 했어. 나 얼마나 후회하라고."


그가 결국 무너져 내려앉았다.

지난 7년 동안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 나도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님은 우리가 도착한 그 날 아침에 처음으로 시도한 

항암주사제의 부작용이 너무 심해 반 조차 투여하지 못하고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까지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신 상태라고 했다.


남편과 그의 누나인 시누이가 담당 주치의를 만나 상의한 후

혈압약 투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채 30분이 되지 않아

나의 아버님께서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너무나도 슬펐지만

가족들은 흐르는 눈물도 닦지 못한 채 모두 노력하고 있었다.


"여태껏 사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 아프지 말고 좋은 데 가서 편히 살아요." 

"아빠. 괜찮다. 편안하게. 편안하게 가세요. 다 괜찮다." 

 

아버님을 사랑하는 어머님의 마지막 인사와

진심으로 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고 싶은 아들의 마지막 인사가

너무 마음 깊이 아프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상을 치르고 우리는 며칠 동안 아버님이 주로 머무시던 방에서 지냈는데

그때 물건들을 정리하며 남편이 아버님의 수첩을 보게 되었다.

남편이 한순간 말이 없어졌다.


좋아하시던 팝송이 영어 가사로 또 한국 번역 가사로 적혀있었다.

우리가 들어봤을 법한 오래된 팝송이었다.


그 수첩 에는

노래가 있고,

시와 글귀가 있고,

좋아하시던 것들이 담겨 있었다.

아버님의 우주가 있었다.


두 남매의 아버지가 아닌

김수철 님의 우주가 있었다.

그 전엔 그 우주를 미쳐 알지 못했다.


남편이 왜 말이 없어졌는지 마음으로 알 것 같아 나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호주로 돌아와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일상생활을 지속했다.

그리 오래 슬퍼할 틈이 없었다.


우리는 영주 비자를 신청한 후 상황이 좀 안정되면 아이를 갖기로 계획했었다.

필요한 영양제도 개월 전부터 준비하여 꼼꼼히 챙겨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몇 주 전 드라이브 중에 불쑥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부인은 근데 왜 아이가 갖고 싶은 거야?"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처음부터 아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5년 동안 이야기해오며 함께 가족계획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영양제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으면서.


"왜? 남편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음. 나는 지금 둘인 이대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긴 해.

근데 부인은 아이를 많이 갖고 싶잖아.

나만 행복하자고 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바로 울거나 입을 닫아버리거나 소리를 질렀을 거다.

하지만 난 이제 그를 좀 안다. 그는 가벼이 이런 말사람이 아니다.


그는 결혼 전부터 '아빠 같은 아빠'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사람이었다.


"그럼 나를 위해서 아이를 낳는 거야?"


"음 지금은 솔직히 그래. 부인 날 알잖아. 

내가 뭘 하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인지 알지. 

너무 무겁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그걸로 인해 내 삶이 너무 힘들어지는 것도 싫어."


이렇게 솔직한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는 버겁다.

솔직해줘서 고맙지만 너무 솔직해서 진짜 밉기도 하다.

순간 대화를 멈추고 마음을 다스렸다.


"나도 좀 당황스럽긴 한데. 나도 남편이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잘 알지.

그래서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낳는 책임감 없는 부모보다 훨씬 나은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남편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난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


남편은 대답 없이 전자담배를 물었다.


이렇게 몇 주가 흘렀다.




어제 또 문득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나와 오랜 통화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누나에게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알게 되었다.

그가 왜 갑자기 아빠가 되기를 주춤했는지.


아버님의 수첩 때문이었나 보다.


당신 스스로의 행복을 좇지 않고

많은 것을 포기하며 아버지로만 살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삶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사는 것이 두렵고 답답해서.

'왜 아빠처럼 살아야 하는데?'라고 누나한테 물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우리의 아이에 관한 고민이 아니라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기간 안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아렸다.

좀 더 일찍이 알아채리지 못해주어 미안했다.


누나와의 오랜 통화 끝에

자기도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되어

새로운 칼라의 행복을 만나보기로 다시 결심했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아기를 갖기로 결심은했지만 

자신의 무언가를 지켜내야한다는 의지인 마냥

오늘 오전 내가 쿠키를 굽는 동안

그는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 계속 조율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그의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그의 아들도 그럴 것임을.

더불어 그의 우주가 더욱 견고해지고 넓어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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