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독일 남자들은 뭐가 문제야?

7월 20일 밤

by 안나

맥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세찬 바람이 불며 드디어 비가 내렸다. 시원했다. 바깥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가게 안쪽으로 몰려 들어왔다. 사방에서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들. 덩달아 나도 기분이 나아졌다. 내 얘기는 그만 하고, 커스틴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해줘. 도대체 그 요르그와는 무슨 사이인거야? 아무리봐도 사귀는 사이 같은데 왜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하는 거지?


드디어 그녀의 연애 생활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지독한 전남친과의 지지부진한 10년 동안의 연애를 정리하고 몇 달 전 우연찮게 요르그와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남친은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는데, 커스틴의 집에 기생하며 바람까지 피웠다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썩 괜찮은 인간처럼 보였던 이 요르그란 남자가 며칠 전에 한국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그것도 완전 삼류 영화)를 던졌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지난 여자 친구에게 정말로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

그래도 커스틴 너랑은 아주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은데 괜찮지?”


야 이 자식아 너라면 괜찮겠냐, 앙?


요르그 역시 전여친한테 정말 더럽게 차여서* 크게 상심했다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른 넷. 스물 한 살이면 그의 고뇌를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그는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지!라고 일갈하는 내게 커스틴은 박장대소를 하며 화답했다. 자꾸 한국어로 욕을 써서 문자로 보내달라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 멍청한 요르그에게 보내야겠단다. 앞으로 다른 한국인을 만났을 때는 절대로, 절대로 이런 말은 하지도 말고 보여주지도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한글로 또박또박 입력해 보냈다. 여러 응용 버전도 가르쳐줄까 하다가 일단은 참았다.


커스틴에게 지금은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하고 그 사람한테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말라고 어줍잖은 충고를 했다. 한 쪽이 다른 쪽에게 더 마음을 줄 때 생기는 수많은 경우 중의 하나였다.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새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신경을 쓰고 상처를 받는 사람은 커스틴 같이 마음이 여리고 심성이 고운 쪽이다.


태풍이 오는 듯한 비바람이 잠시 멎자 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이 근방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 구글맵을 켜고 어떻게 귀가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회의 중인 미어캣들 같아서 혼자 빵 터졌다. 그 중 한 힙스터의 왼쪽 팔에 새겨진 타투가 내 눈길을 붙들었는데(편의상 한스라고 하자) 스트리트 아트 풍의 디자인이라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


“저기 잠시만요.”

“앗 죄송합니다(입구에서 비켜달라는 말인 줄 알고 얼른 걸음을 옮긴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타투 좀 자세히 봐도 될까요?”

“그럼요! (엄청 기뻐한다) 저기 있는 양반이 제 타투해준 사람이에요.”


한스의 팔에는 한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포즈로 서 있는 아주 독특하고 멋진 디자인의 타투가 있었다. 오 진짜 쿨하네요. 감사합니다요, 대화를 마무리 지었더니 잠시 후 바로 그 타투이스트가 내게 다가온다.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여주며 자기 작업에 대해 궁금하면 이 계정을 찾아 들어와서 한번 보란다. 한스가 일행에게 돌아가서 저기 저 중국 여자가(ㅋㅋ) 내 타투가 마음에 든대! 우히힛! 하고 자랑한 모양이었다. 한스의 일행 모두 양쪽 팔에 멋진 타투가 있었다. 내가 그 중 한스에게만 말을 걸어 타투를 자세히 관찰하자, 약간의 부러움을 느낀 것도 같았다. 이곳에서 낯선 이와 말을 섞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아주 작은 부분을 칭찬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와우... 정말 멋진 타투네요.”

“우왕 강아지가 너무너무 귀여워요. 강아지한테 인사해도 될까요?”

“우와왕 이 음식(혹은 커피, 칵테일, 맥주 기타 등등) 정말로 맛있어요. 나중에 또 올게요.”


사실 별거 없는 나의 말에 약간 무서워 보이는 베를린 사람들조차 활짝 웃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인 식당이나 카페가 아닌 이상 즉 평범한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모든 공간에서는 늘 굉장한 친절을 경험했다. 아니 내가 책에서 읽은 독일 사람들은 이렇게 밝고 해사한 웃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돈많은 중국 여자인 줄 아는건가. 일주일 동안 고민해본 결과(이렇게 쓰면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 것 같지만 사실 몇 분 안 된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대체로 맥주 마시느라 바빴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뮌헨 같은 보수성이나 함부르크나 프랑크푸르트가 가지고 있는 부유한 자들의 거만함 따위는 발을 붙일 수 없는 도시다. 베를린은 한적한 동네의 버스 정류장에도


“트랜스젠더임을 자랑스러워해요!”


라는 문구의 포스터와 얼굴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실제 성전환을 완료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독일어를 하지 못해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카드 결제가 안 되는 식당과 카페가 많아서 더 불편했다. 이 도시에서는 한동안 이방인으로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끔 장어구이와 순대국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에어컨이랑 엘리베이터는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전여친이 외국에 잠시 공부하러 갔는데 거기서 바람이 나서 그만 결혼까지 했단다. 그 소식을 베를린에서 들어야만 했던 요르그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상상이 갔다. 그 전여친이라는 여자도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계정 이름을 까먹었다. 정말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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