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오후
토요일 아침, 느지막히 일어났더니 작업실 동료 현아씨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언니 요새 왜 작업실 안 오세요? 저는 지금 베를린입니닷! 하고 대답하니 베를린에서 가보면 좋을 곳의 리스트를 보내줬다. 감사한 양반같으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늘 가던 카페에 아이패드를 들고가 그리스식 오믈렛과 커피를 마시며 밀린 일기를 썼다. 리타언니는 뭐하나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직장 동료를 만나 밥을 먹고 지금 자려고 누웠다고 했다. 베를린 어때, 좋아? 하는 언니에게
“언니, 나 여기서 떠나고 싶지 않아. 앞으로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오고 싶어.
휴양지고 뭐고 나 이제 아무 곳도 안 가도 돼요.
앞으로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찾을 수 없을 거에요.”
아니 정말 그 정도로 좋아? 나도 가고 싶다아... 울먹이는 언니에게 잔뜩 자랑을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 전화가 끊겼다. 역시 세계 최고 IT 강국은 한국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언니는 내게 너의 목소리에 행복감이 가득 묻어나 있어서 다행이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내가 가장 괴로울 때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더 안심한 눈치였다. 허나 매일매일 술을 때려 마시며 시차에 적응하면서(?) 숙취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무슨무슨 박물관이든 갤러리든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동네 산책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털이 북슬북슬한 강아지가 철푸덕 길가에 누워 있었다. 그 치명적인 뒤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홀린 듯이 쭈그리고 앉아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강아지... 너무 예뻐요. 제가 좀 만질만질 해도 될까요?”
“오 그럼요, 물론이죠. 얘는 모모라고 하는데 아까 호수에 다녀와서 피곤한 지 더 산책을 안 하려고 하네요. 지금 다른 공원으로 데려가야 할 지 집으로 가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모모,라는 이름의 개성 강한 강아지를 토닥이고 있자니 주인이 잠깐 볼일이 있다며 강아지와 2분만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길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세상에서 가장 얌전하고 지 멋대로 산책 일정을 정하는 힙한 강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니 생전 처음 보는 날 어떻게 믿고. 난 독일어도 못하는데. 뭐지 이 동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오후였다. 인류애가 솟아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돌아오는 길을 잘못 들어* 공연히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방에서 잠시 쉬다가 커스틴과 저녁을 먹기 위해 프리드리히샤인으로 향했다. 바로 어제 그래피티 투어를 시작했던 장소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역 앞에는 세상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하나도 없어 보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 유로화를 던져 주기를 기다리는 모습에, 너네야 그렇다 쳐도 너네가 데리고 다니는 개들한테 밥은 제 때 주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독일어를 못하니 참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한밤중에 아주 강한 비소식이 있었다. 그 때문에 공기가 너무 습하여 심각하게 땀이 났다. 이상하게도 지하철 안에서 더위를 호소하는 승객은 나 밖에 없어 보였다. 나보다 더 건장하고 긴 옷을 입은 남자들조차 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게르만족이라 이런가? 지난달, 폭염의 도시를 뚫고 온 나는 왜 이렇게 더위에 취약한 것인가. 왜 이놈의 나라는 지하철 안에 에어컨이 없는 것인가. 왜 사람들은 이 부조리한 도시 환경에 시위를 하지 않는 것인가. 길고양이가 이용할 수 있는 급수대를 500미터에 하나씩 설치해달라고 도심 곳곳에서 시위를 하면서도(당연히 내 상상이지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정작 시민의 쾌적한 이동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지쳐갈 때 쯤 목적지역에 닿았다. 아마도 이 심각한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활동 방안을 세우기전에 목적지에 도달해서 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은 서울에 비하면 작은 도시라 U반과 S반을 이용하면 대강 30-40분 이내에 핫플레이스로 갈 수 있다. 치밀한 인간들 같으니. 역시 게르만족들은 만만하지 않다.
오늘 커스틴과 만날 장소는 복스하게너 플라츠* 근처의 비건 식당 1990 Vegan Living이다. 커스틴은 아주 엄격한 채식을 실천하고 있는 비건이다. 나는 대략 이틀에 한 번 고기를 먹어야 하지만 외국에 나오면 이틀에 한 번은 꼭 아시아 음식을 먹어야 한다. 한식은 물론이고 베트남, 태국, 일본 가리지 않고 먹는다. 이상하게 서양식의 식사는 배부르게 먹는다고 해도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 아주 핸섬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은 없는 사람이랄까. 내가 아시아 출신임을 부정한 적도 크게 자랑스러워 한 적도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탄수화물과 특유의 채소 반찬과 쌀과 국수에 대한 집착은 점점 커져간다. 심지어 평생 입도 대지 않는 시금치나물도 소처럼 먹어치운다. 이런 현상을 두고 꼰대라고 판단하면 안 되는데.
수많은 손님들을 헤치고 테이블에 앉아 타이거 비어와 그럴 듯해 보이는 음식을 주문했다. 퓨전 요리 레스토랑이라 메뉴만 보고서는 당최 알 수가 없다. 아마 야심찬 사장이 피를 토하면서 메뉴 이름을 정하고 레시피를 수정했을 것이다. 항상 풀을 뜯는 베를리너들이 환장할 수 밖에 없도록.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뉴가 배달되었다. 흑미 밥과 두부와 쌀로 만든 면과 각종 채소가 매콤한 소스에 어우러져 이렇게 저렇게 들어간 묘한 음식이었다. 신나게 두부를 집어 먹는 내게 커스틴이 조심스럽게 여기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어봤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 나한테 아시아 음식이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야? 당연하지 무슨 소리야!”
그녀가 내 젓가락 신공을 보며 감탄하기에 속성으로 조금 더 효율적으로 반찬을 집어먹을 수 있는 젓가락질을 알려주었다. 바로 옆 테이블의 독일인 커플들도 안 보는 척 내 손가락을 관찰하며 연습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근처에 있는 비건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그렇다 비건을 위한 아이스크림도 있을 뿐더러, 채식을 하지 못하면 비명횡사할 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 했다. 이 사람들을 한국의 사찰로 끌고 들어가 6개월 정도 절밥을 먹여보고 싶었다. 과연 너희들이 버틸까?) 설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다소 경망스럽게 아이스크림을 핥는 내게 커스틴이 수줍게 선물을 건냈다. 바로 13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펍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담은 액자였다. 스물 둘, 스물 넷의 우리들은 정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는 그 이후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무엇도 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한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재회를 기념하여 사진을 찍자는 그녀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셀피를 찍었다. 너무 불편하고 어색해하는 내게 커스틴은 왜 이렇게 사진 찍는 걸 힘들어하냐고 물어봤다. 어물쩡 넘길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사실 말이야, 나는 내 모습을 혐오해. 아침에 샤워하고 나서도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을 때도 있어.
나는 나 자신을 정말 싫어하고 이렇게 그저 그렇게 사는 내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용서할 수 없거든.
요새 정신과에 가서 받는 상담도 보통 이런 주제에 대한 건데, 아직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 미안해.”
토요일 밤 복스하게네 플라츠 주변을 따라 걸으며 정신과에서 털어놓았던 나의 가장 큰 고민을 간추려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삶의 방향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십년 간 나의 목표는,
1. 도망가지 않는다
2. 엄마보다 먼저 죽지 않는다
지난 해 봄,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큰 수술을 받고 혼자 고통스러운 회복 과정을 거치면서 찾아온 우울감과 무기력에 매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더 이상 이 삶을 지속할 이유도 의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살아있니?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제는 그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이런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가 샤이니 종현의 유서를 찾아 읽어본 적도 몇 번 있었다. 수고했다고 말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한참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계속 글을 쓰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프로젝트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깊은 생각 없이 시도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무작정 짐을 싸고 먼 도시로, 먼 나라로 길을 떠나왔다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얼마나 많이 아파하셨는지, 그런 엄마 앞에서 나는 일부러 많이 웃었고 혼자서는 아주 많이 울었다고도 말했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커스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프리드리히샤인의 어느 펍에 앉아 한국의 친구들에게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어떤 말들은 밖으로 내보내기조차 너무 아파서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그런 밤이었다.
*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굉장한 방향치다. 어떤 건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늘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가곤 한다. 지도에 내가 어느 방향을 보고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지도도 잘 보지 못한다. 다행히 구글맵에는 화살표로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니는 거지, 안 그러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JONES ice cream 나중에 알고보니 엄청난 맛집이었다. 주말에는 가게 밖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을 정도다. 가게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와플 콘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서 먹으면 꿀맛이다. 와플 추가 비용은 0.5 유로.
*Boxhagener Platz 가이드북에는 ‘복사게네’라고 써있지만 나처럼 발음해도 독일인들은 다 알아듣더만.
*Balaram 비건을 위한 아이스크림이라 하여 해괴망측한 맛일 줄 알았더니 그냥 아이스크림 맛이다. 꽤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