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프기도, 웃기기도 한.

7월 17일 밤

by 안나

어제 갔던 단트라에서 글을 쓰면 될 것 같아 아예 아이패드를 들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속이 든든해지는 할머니 집밥이 먹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검색해 유독 평점이 높은 곳으로 갔다. 더블 아이도 할머니 식당도 다 거기서 그 근방이었다. 확실히 동성애자들이 꽉 잡고 있는 동네다 보니 식당의 서비스와 음식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가격 역시 마찬가지. 5분 정도 검색을 하고 오늘의 저녁은 라갈란테(Lagalante)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라자냐 혹은 리조또가 있을 줄 알았는데 메뉴에 없었고 영어 메뉴 역시 없어서 너무 아름답고 친절한 이탈리아인 직원이 내 옆에 가져다 준 작은 메뉴 칠판을 보고 온갖 추리에 추리를 거듭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책 중에 [HEAT]라는 에세이가 있다. 오랫동안 뉴욕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빌 버포드가 직장을 그만두고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 마리오 바탈리의 주방의 노예로 취직한다. 1년 넘게 그의 주방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은 저자는 내친 김에 이탈리아로 요리를 배우러 간다. 이 책을 열심히 읽는다면 당연히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단어를 알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라구’. 이 라구*는 우리나라 김치와 마찬가지여서 각 가정마다 만드는 방법도 그 맛도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고 했다. 저기 안토니오네 집 딸래미 소피아가 만드는 라구가 기가 맥히다는 소문이 나면 곧 사위 후보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라구는 이탈리아 요리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영어에 서툰 직원과 아는 독일어라곤 당케쉔** 밖에 없는 나 사이에 온통 이탈리아어로 쓰인 정감 있는 메뉴판이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 바로 이 ‘라구’가 있었다. 이거닷! 이걸 시키면 토마토소스와 고기가 들어간 할머니 정성이 듬뿍 담긴 파스타를 내주겠지. 역시 나의 생각은 어긋나지 않았다. 올 여름 이 식당에서 밀고 있는 달콤한 로제 와인과 함께 파스타를 씹어 먹었다. 따뜻함이 몸속에 차올랐다. 계산을 하려고 바 쪽으로 갔더니 너무나도 매력적인 한 여자 바텐더가 와인과 식사는 만족스러웠는지 물어본 후 나가려는 내게 작은 샷을 한 잔 따라줬다. 인정하자, 전 세계 바텐더들이 보기에 나는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넙죽넙죽 잘만 마실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준 것은 커피 원액에 아마도 진으로 추정되는(사실 마실 줄만 알지 개뿔 모른다) 스피릿을 섞은 것이다. 그것을 베이스로 하여 칵테일을 만들면 또 기가 막힐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씩씩하게 어제 들렀던 바로 향했다. 오늘은 정말 멋진 하루였어. 어서 가서 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말테다.


허나 어제 밤에 북적였던 바에는 나와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남자들 두 명밖에 없었고 곧 그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다 싶어 친절하기 그지없는 바텐더에게 히틀러 벙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곧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약간 무섭고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따뜻한 눈을 가진 바텐더의 이름은 막스. 전형적인 독일인의 이름이다. 서독에서 태어나 9살 무렵 온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를 왔고 바텐더 일을 하기 전에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 중 중국에는 무려 3년이나 있었다고 하여 나는 독일인입니다,라는 문장을 중국어로 기억하냐고 했더니 하더구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죄 없는 바텐더를 붙잡고 막 진상을 부린 것 같지만 다행히도(?) 오늘의 진상은 내가 아니었다.


한 러시아 남자가 와서(나중에 그는 우루과이 출신으로 밝혀진다) 거하게 맥주를 마신 뒤 보드카를 달라고 청한다. 러시아산을 원했으나 불행히도 스웨덴 산 밖에 없었다. 그냥 갈 줄 알았더니 그래도 한 잔 달라고 한다. 맛이 괜찮냐고 했더니 이 보드카의 맛은 완전 똥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오늘은 자신에게 허락된 아주아주 작은 일탈의 기회라고. 누구나 가끔은 가족과 직장에서 벗어나 하루 쯤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하여 막스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한국의 아버지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아내, 혹은 장인 장모에게까지 시달리는 베를린의 힘없는 가장인가보다,하고 흥미를 느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의 이름은 요아킴. 한 때 대략 10년 동안 프로 축구 선수로 뛰었고(어느 리그였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본 것 같은데 말해주지 않았다) 다리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전 세계를 유람하다가 어쩌다보니 이 곳 베를린에 러시아인 여자친구(그녀의 이름도 안나)와 함께 살고 있다고. 여기까지는 뭐 그러려니 했다. 그는 계속 맥주와 더럽게 맛없다는 스웨덴 보드카를 들이켰고 내게도 계속 술을 샀다. 그와 나 말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기묘한 밤이었다. 술이 너무 취해 초점이 흐려진 그는 함께 저기 바 뒤 쪽에서 담배를 피우자고 했다. 셋이서 이미 한참 재미나게 대화를 나누었기에 단번에 거절하기도 애매하여 일단 흡연석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구석진 곳에 단 둘이 앉으니 아까와는 다른 야릇한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나보고 로마에 가본 적이 있냐고 했다. 아니 로마는 안 가봤다고 했더니 꼭 꼭 로마의 콜로세움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왜 하필 콜로세움이냐고 물어보니 도대체 해석 불가능한 말을 늘어놓으며 이때부터 나를 정말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안나, 콜로세움의 그 벽에 손을 대봐. 그 벽을 느껴봐야 해. 그리고 너는 짐승이(!) 되는 거야 이렇게!! 그리고.... 내게 전화해”


다행히 그도 정신을 나갈 정도로 취한 건 아니어서 너무 적나라한 제스처는 취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외설적인 느낌의 동작을(그러니까 당신이 상상하는 바로 그 동작)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고 아주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너는 비록 내게 발정이 났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지만 나는 모르고 있고 앞으로도 알고 싶은 일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더니 다행히 대화는 흐지부지 끊겼다. 잠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막스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헐 저 남자, 완전 나랑 지금 자고 싶어서 난리야. 이것 참 난감한데.”

“괜찮을거야. 지금 묵고 있는 숙소가 어디야? 가까워? 데려다줄까?”

“아 바로 옆이니까 걱정마. 근데 저 사람 진짜 골 때린다. 살다가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몫의 맥주까지 다 마시고 졸음도 쏟아지겠다, 다행히 막스가 바를 정리하며 문을 닫을 시늉을 했다. 감사합니다 센스쟁이 막스. 아직도 뜨거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요아킴에게 나는 이제 너무 피곤하니 그만 자러 가야겠다고 인사를 했더니 이 양반이,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너 내가 지금 뭘 원하는지 혹시 알고 있어?”


나는 단호하게 모른다고 대답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내가 떠난 뒤 막스가 그에게 시달릴 것이란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열두 시 전에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결국 1시가 넘어서야 침대에 들었다. 커스틴은 심지어 그때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남자 친구가 아닌 남자 친구 요르그가 나 역시 주말에 만나서 같이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댄다. 일단 알았다고 내일은 우리 둘 다 너무 피곤하고 일하느라 바쁠 것 같으니 금요일에 저번처럼 또 다 같이 보자고 답변을 보냈다. 사실 나 지금 바에서 어떤 남자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이 인간이 완전 짐승이라고 나중에 자세히 말해주겠다고 했더니 너무 흥미진진하게 생각하더군. 미안 커스틴. 네 생각처럼 전혀 로맨틱한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조금 서글펐어. 웃기기도 했고.


비틀 비틀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잠을 청했다. 베를린에서의 네 번째 밤이었다.



*이탈리아 요리에서 파스타에 넣는 전형적인 미트 소스이다.


**Dankeschön 독일어로 고맙다는 뜻이다. 당케!라고만 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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