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은 비빔밥으로

7월 16일

by 안나

계속 뒹굴다가 집 근처 할머니 한식당*으로 비빔밥을 먹으러 왔다. 동양인은 나 혼자 뿐이고 누가 봐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장님은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어 하시죠?하고 물어본 내가 너무 민망했다. 당황해서 옥수수차 까지 주문했다. 도대체 이 비빔밥이 왜 외국인들에게 그렇게나 매력적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 여고를 졸업한 수많은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니까 아주 가끔 생각나면 먹는다. 냉장고를 비워야 할 때도. 사실 외국에 나와서 가장 먹고 싶은 건 역시 김치찌개, 순두부 찌개(평소에는 먹지도 않는다) 그리고 순대국밥과 너구리 얼큰한 맛. 그러나 이 식당의 평점이 무려 4.9라서 일단 왔다. 슈니첼이고 커피고 뭐고.


새우튀김을 넣은 비빔밥과 된장국을 주문했더니 내일 예정된 베를린 시티 투어가 취소됐다고 문자가 왔다. 어쩐지 너무 싸고 조금 느낌이 쎄-하더라니. 짜증나서 더 인기 많고 비싸고 일정이 긴 워킹 투어를 내일 오후 일정으로 신청했다. 가이드와 만나는 장소도 가깝다. 포츠다머 플라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축축하고 착 가라앉은 날씨다. 한국의 늦가을 같다. 크아 된장국 완전 해장되네. 어제 하루 종일 한 끼 먹고 맥주만 때려 마셨더니 아주 뜨뜻하고도 시원한 국을 부어넣고 싶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한국어가 너무 하고 싶어서 냅다 리타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퇴근 전에 민원인에게 봉변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난쟁이 똥자루인 지사장에게 또 뒤통수를 맞았단다. 아아 괜찮아 알과장. 자네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나랑 같이 민원인 상대해. 이래놓고 자기는 언니를 민원인 앞에 앉히고 그럼 전 이만, 하고 쏙 빠졌다고. 아 진짜 둘이 말하다가 얼마나 웃었는지. 이 정도는 되어야 지사장을 할 수 있다며 또 감탄을 했다. 사무실의 동료들 모두가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정말 회사는 어설픈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거리에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쩐지 쾌감으로 다가왔다. 다소 외롭긴 해도. 비빔밥을 먹고 내키는데로 게말데 갤러리에 왔다. 고대하던 카라밧지오 관은 보수 중이라 개방은 안한다고 하여 루벤스, 렘브란트, 베르미어를 찾아 서둘러 돌아다녔다. 아쉽게도 작품들 중에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건 거의 없었다. 사실 관람객 중에 그들의 몸과 얼굴 그 자체로 그림인 경우가 왕왕 있어서 저리고 아린 발을 두드리며 흐뭇하게 몰래 관람했다. 정말 나란 변태...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포스터 매그넛을 사서 갤러리 밖으로 나오는 순간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봤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름이다. 기분이 좋아져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까 했다. 그러다 내키는대로 티어가르텐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베를린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번에 내 플레이리스트에 새로 들어온 밴드는 루아멜*. 몇몇 곡의 분위기가 넬과 놀랄 정도로 흡사한데 그게 거북하지 않다. 루아멜과 라우브*를 들으며 한참을 걷다가 200번 버스를 타고 아인슈타인 카페*에 들어왔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독일어가 아닐까 싶네. 해가 나서 그런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환해보인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다들 날씨에 일희일비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KakaoTalk_20190815_192425107.jpg 게말데 갤러리를 나온 순간 펼쳐진 광경



커피를 다 마시고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왔다. 소냐와 잠시 호구 조사를 마치고 커스틴에게 연락하여 목요일에 커피 마시고 저녁 먹기로 했다. 넋을 놓고 있다가 쿠키로 조금 배를 채우고 집 바로 앞에 대단히 쿨해 보이는 바에 들어왔다. 그 이름은 단트라*. 정말로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저녁에 별 계획이 없으면 슬금슬금 들어와서 칵테일 마시면서 책을 읽든지 글을 쓰든지 하면 좋을 것 같다. 설마 일할거면 꺼지라고 하지 않겠지.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마시며 아이패드 타자를 치고 있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친절해보이는 눈을 가진 바텐더가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찾았다, 베를린에서의 완벽한 작업실. 한참 지난 여행에 대한 글을 다듬다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샐리 보울스*라는 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칵테일 바 샐리 보울즈


나를 베를린으로 이끌게 한 바로 그 책 [베를린이여 안녕]의 문제적인 그녀의 이름을 딴 바라고 하여 흥미가 생겼다. 총총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요일 저녁이라 사람이 거의 없다. 칵테일 샐리 보울즈를 시키고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았다. 원래 제일 잘하는 건 메뉴 가장 위쪽에 있으니까 위험성이 아주 낮다. 사실 그 책이 뭔 내용이었는지 완전 다 까먹었다. 그럴 줄 알고 한국에서 챙겨왔다. 야심차게 주문한 칵테일은 오미자차 같은 맛이 난다 아주 맛나다. 작업하던 글을 대강 마무리하고 집으로 부지런히 걸어오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취해서 속으로 계속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알싸하게 취하면 이상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부장님 같은 성격인가.


길을 걷다 어떤 소년이 엄마를 붙잡고 한이 맺혀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봤다. 아마 어디 멀리서 집으로 찾아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듯 했다. 엄마는 아이를 꼭 안고 계속 달래줬다. 내 작고 아늑한 방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와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제 나한테는 무섭고 슬플 때도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을 세상 단 한명의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이 생각만 하면 계속 눈물이 난다. 그런데 약을 먹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이게 과연 울어도 될 일인가 진지하게 고민한 다음에 그 정도로 슬픈 건 아니라고 판단이 들면 울지 않는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일까. 저녁을 건너뛰고 독한 술을 마셔서인지 아님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 건지 속이 쓰리다. 눈물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없어서 슬프다. 이런 감정을 온전히 느껴도 괜찮은 건지, 아님 이 정도면 괜찮으니 그만 울어, 하고 멈춰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제 정말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해도 그런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줄 단 한 명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게 너무 괴롭다.



오늘은 그만 자야겠다.



*Halmoni Restaurant 비빔밥을 주력으로 하는 한식당이다. 채소에 굶주린 수많은 베를린 사람들로 늘 붐빈다. 새우 튀김이 올라간 비빔밥 등에는 튀김용 소스까지 뿌려줘서 고추장과 함께 비비면 좀 짜다. 맛에 민감하다면 소스를 따로 내달라고 부탁해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인 리타언니는 현재 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화려한 외모와 빠른 승진 및 대학원 진학으로 사무실 직원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나는 그녀를 뿅뿅의 아이돌이라고 부른다. 나의 영혼의 동반자이며 그동안 여러 도시로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별명은 알리타. 그 영화 캐릭터와 완전 똑같이 생겼다.


*프리츠 랑. 오스트리아의 영화 감독으로 독일 표현주의 사조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거장이었다.


*SF영화의 시조새 격인 작품. 이 영화에 나오는 로봇의 디자인이 스타워즈 C3PO의 모델이 되었다고도 한다.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써놓으니까 본 것 같지만 사실 본 적 없고 매그넛은 그럴 듯해 보여서 사왔다.


*LUAMEL 베를린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화장을 할 때까지’와 ‘BLUE’


*LAUV 이 양반이 바로 나만 안다는 아주 대중적이며 핫한 미국의 뮤지션이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Paris in the Rain’ 올 여름 라우브의 노래가 없었다면 여행지에서 덜 행복했을 것이다.


*Einstein Kaffee 아인슈타인 선생님이 메롱하는 사진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커피 맛은 그냥저냥.


*DanTra's 이번 베를린 여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펍이다. 집 바로 앞에 있어서 들어간 거였는데 알고보니 그 동네 주민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 깨알같이 노는 장소였다. 진짜 베를린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으로 가야 한다. 9월에는 코스튬 파티도 열린다고. 펍에서 만난 동네 주민들이 내게 왜 9월이 아닌 7월에 왔냐며 아쉬워했다. 여름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짧은 연극도 무대에 올린다. 이곳의 바텐더 막스는 극단에서 배우로도 일하고 있다.


*Sally Bowles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베를린이여, 안녕]의 여성 캐릭터. 이를 모티브로 한 영화 <카바레>(Cabaret, 1972)에서 샐리 역을 맡은 라이자 미넬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에서는 1년 내내 뮤지컬 카바레가 공연된다. 한번 보러 가볼까 했으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별로 내키지 않았다. 왓챠 앱에는 ‘캬’바레로 등록되어 있으니 한국영화 <카바레 부인>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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