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독일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도시로 오다

by 안나

비행 9시간 째.


사람들이 점점 좀비처럼 변하고 있다. 게다가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다들 천식 환자처럼 기침하고 있다. 내가 괜히 마스크를 쓴 게 아니지. 에헴. 마지막으로 먹이를 주려나보다. 아까 간식으로 삼각김밥(오늬기뤼-)를 주길래 하나 먹었는데 겁나 맛없어서 놀랐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려면 힘을 내야 하는데 피곤하다. 아무래도 못 뛸 것 같다. 머리가 아프다. 간단하게 파스타로 저녁을 먹고(와인 또 마셨다) 블랙티를 한잔 받았다. 그 와중에 승무원 캡틴인 것 같은 아저씨가 와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데 우왕 독일어 섹시하다...


루프트한자 여승무원들은 대체로 떡 벌어진 어깨와 튼튼한 하체를 가졌다. 그리고 안경을 쓴 직원들도 많다. 만약 승객 중 누군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도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다소 예쁘장하거나 가냘픈 쪽은 젊은 남자 승무원들인데 그들은 우리집 강아지 봄이가 봐도 게이인것이 티가 난다. 아주 마음에 드는 조합이다. 물론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국적 항공사들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해서 더 문제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땅콩 껍질을 까줘야 한다거나, 라면을 취향에 맞게 끓여줘야 한다거나.


아주 예전에 공항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풀착장에 풀 메이크업을 한 대한항공 승무원을 봤다. 늘 그렇듯이 단아하고 어여쁜 외모의 소유자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옆에 아주머니들이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딱 한마디로 품평을 마쳤다.


“우리나라 스튜어디스들이 진짜 제일 예뻐!!”


그 아주머니들에게는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몸과 화사한 표정의 아름다운 승무원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이기도 하고 그것이 곧 본인들의 자존심의 척도였던 것도 같다. 만약 그 아줌마들이 그럴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유나이티드 항공이나 루프트한자 혹은 그 악명 높은 아에로플로트를 타는 상황이 생긴다면 ‘어디 시장바닥에서 장사할 것 같은’ 풍만한 몸매의 아줌마들이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과 그들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승객들을 응대하는 행태를 보고 나중에 본인들의 자식과 며느리와 손주들에게 혀를 끌끌 차며 불만을 표출했을지도 모른다. 거긴 말만 선진국이지 역시 이런 건 한국이 최고야. 우리 스튜어디스들은 너무너무 이쁘고 너무너무 잘해. 거기는 뭘 달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그런 어르신들에게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엄마 말이 맞아요. 한국만큼 승무원들이 예쁜 나라가 없다니까?! 혹은 에이 엄마, 승무원들이 예쁘고 날씬한 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중요하게 해야 하는 업무는 안전 관련한 일이래요. 사고 나면 승객들 구하는 거.


다들 화장실 앞의 작은 공간에서 깨알같이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몸을 풀어준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끝없는 하늘을 날아 무사히 프랑크푸르트 착륙. 피로함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정신없이 환승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프랑크푸르트 공항이긴 하다. 베를린 행 비행기 안에서 아이폰을 충전하며 글을 쓰고 있으니. 이제 마지막 테겔 공항 하나만 남았다. 이렇게 거지같은 일정으로 유럽으로 향하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 그래서 아까(라고 하지만 거의 24시간 전의 일이다) 아시아나 승무원이 오늘 두 번이나 환승하시냐고 재차 확인했나보다.


프랑크푸르트에 십분 먼저 도착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기장님에게 한 시간 정도 빨리 왔다면 기립 박수를 쳐줬을 거임! 이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독일어를 몰라서 참았다. 소문으로 들었듯이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은 광활했다. 내가 타야할 게이트는 A구역이었고 내린 곳은 C구역. 나처럼 환승을 하는 수많은 이들이 공항을 배회하는 모노레일을 타고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찾아 길고 긴 여정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자세로 보안 검색을 받고(뭐 이런 애매한 자세를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서도) 재수 없으면 다음 항공편을 놓치기 쉽다는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다행히 인천에서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대기줄을 차지하고 있어서 금방 내 차례가 왔고, 그룹 투어 인솔자 아저씨의 팁을 귀담아 듣고 이티켓을 꺼내줬다. 생각해보니 이미 몇 번이나 실전에 임한 경험이 있는데도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심사관이 별다른 건 물어보지 않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줘서 행복에 겨워 환승 게이트로 향했다. 오늘이 작년 월드컵 직후가 아니라 다행이다. 환승할 게이트가 입국심사대 바로 앞이라 죽도록 뛰는 불상사는 없었다. 솔직히 에너지를 다 소진했기 때문에 뛸 힘도 없었다. 공항의 신께서 나를 도와주셨음에 틀림없다. 잠깐 숨을 고르고 있자니 곧 보딩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베를린 행 비행기에는 센스있게 잘 차려입은 힙스터들이 가득하다. 눈호강은 실컷 하다가 한국으로 갈 수 있겠다. 승무원들도 다 모델들 같다. 한 남자 승무원은 무려 상투를 틀었다. 드디어 세계 최고 힙스터의 도시, 베를린으로 간다.


3-3 배열의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인 같지 않게 이륙 전 안전 사항도 알려주지 않았다. 매번 비행기가 활주로로 나갈 때 비상 탈출을 알려주는 비디오를 볼 때마다 실제 사람이 시연하든 컴퓨터로 구현한 이미지가 시연하든 상관없이 모두 다 얼굴에 굉장히 사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전 세계 항공사들이 동영상 제작할 때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들 최대한 수상쩍은 미소를 띠게 하자고 비밀리에 정한 느낌이다.


기장님이 뭐라 뭐라고 하는데 이제 곧 출발할테니 허튼 짓 하지마쇼. 혹시나 이 비행기가 바다에 빠지면 각자 알아서 해결하시라. 이런 종류의 말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영어로 친절히 다시 설명해주셨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있으니 다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어쩌면 사람들 짐이 연결이 아직 안 될 걸 수도. 아무래도 공항의 신이 입국심사대까지만 내게 행운을 보내준 것 같다. 게다가 기내 와이파이 연결은 되나 정작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생색은 내지만 실제 할 수 있는 건 없게 하는 의도는 무얼까... 내가 책으로 배웠던 독일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역시 게르만족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8시인데도 아직도 밖이 환하다. 유럽의 여름을 다시 만났다. 환한 하늘에 달이 떠있다.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허나 여행의 신은 감상에 빠진 내게 마지막 관문을 하나 더 남겨줬다. 비행기가 베를린에 멋지게 착륙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역시나 사람들을 버스에 때려 넣고 공항 터미널까지 실어다줬다. 아니 이 거대한 국가 독일 수도의 공항이 무슨 시골 공항보다 더 작다. 다른 동네에 있다는 쇠네펠트 공항은 이거보다 더 작다는데 그게 가능한 크기인가. 확실히 이 나라의 부유함은 남부에 치우쳐있다. 뮌헨 공항도 엄청나게 화려할 것임을 알겠다.


내 짐이 제일 첫 번째로 나와서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택시를 잡아 소냐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터키 혹은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는(굉장히 섹시하다) 내가 팁으로 5유로 정도를 더 주자 처음에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나를 노려봤다. 40유로면 충분하다니까 왜 더 줘?해서 당황한 나는(이제까지 팁인걸 모르고 거절하는 택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떠듬떠듬 영어로 구구절절 설명했다. 아니 팁 줘야한다고 나는 알고 있는데... 내 짐도 옮겨주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팁인데... 그제서야 그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주 밝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내가 아파트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벤츠를 몰고 떠났다. 그렇다, 독일 택시는 죄다 벤츠였다. 독일인 택시 기사는 팁도 그냥 받지 않는다. 내게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자신이 납득하고 나서야 기쁜 마음으로 받는다. 이 도시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오늘 여정의 정말정말 마지막 관문은 소냐의 아파트로 내 짐을 들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독일의 대부분 오래된 아파트가 그렇듯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내 짐은 줄이고 줄여도 20킬로그램. 나는 지난 24시간 동안 거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쩌나 들고 올라가야지. 그나마 이미 알고 있어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한참을 낑낑대며 5층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얘가 왜 안 오나 기다리던 소냐가 내려와서 도와줬다 흑흑. 감사합니다. 4층 계단에서 포기하고 싶었어요.


소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 레니와 아주 귀여운 강아지 엘라와 함께 살고 있다. 오자마자 준비해온 선물을 조공했다. 집주인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엘라는 내가 사온 간식을 매우 잘 먹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 기진맥진하여 샤워를 마치고 드디어 내 방 작은 소파에 앉아 오늘 마지막 일기를 쓴다.



3주 동안 나의 은신처가 되어 줄 베를린의 방


아주 먼 길을 따라 이 곳 베를린에 왔다.


많은 곳에 가보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자. 지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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