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베를린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여행 오기 전 빡빡하게 정리해둔 일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핵심 중에 핵심 장소를 쪽집게 강사에게 배우듯 순례하고 나니 흥미가 사라졌고, 딱히 한 일은 없는데 써야 할 소재는 계속 생겨서 밀린 일기쓰는 초딩의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느지막히 일어나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구름의 형태를 관찰했다. 어디선가 플루트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의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걱정될 만큼 아름다운 오후였다.
늘 가는 카페 바로 옆 거리에 평점이 아주 높은 그리스 식당*이 있었다. 오늘은 꼭 몇 달은 기다려온 그놈의 기로스를 먹고야 말테다. 사실 홍대에서도 이태원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었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낯선 곳에 오면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에 대한 갈망이 마구 솟구친다. 그리고 뭔지 모르게 더 믿음이 간다. 서울보다야 베를린 식당이 더 맛있게 하겠지.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그리스 식당에서 라들러와 기로스*를 주문하니 올리브와 빵을 먼저 가져다준다. 일주일 동안 먹은 빵 중에 가장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 집 올리브 잘 하네, 감탄하고 있으려니 감자튀김과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 즉 그토록 기다렸던 기로스가 나타났다. 눈물을 흘리며(물론 마음속으로)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갑자기 벌들이 나를 습격했다. 주변에 화단과 꽃이 많아서 늘 벌들이 호시탐탐 테이블 위의 요리를 노리는 듯 했다. 한참 밥을 먹다가 아크로바틱한 동작으로 벌을 피하는 날보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웨이터가 다가와 독일어로(!) 설명을 한다. 어쩌면 그리스어 였을지도...
“벌이 귀찮게 하면 이렇게 손을 확 때려잡아요. 이렇게!!”
아니 아즈씨 손으로 잡으라니요. 그게 가능하면 제가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음식을 치운 후에도 벌은 포기하지 않았다. 라들러* 두 잔으로 용기백배해진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베를린이여, 안녕]을 읽었다.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베를린의 지명도 그 당시의 상황도 너무 낯설어서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겨우 일주일 있으면서 역사 공부 조금 했다고 책 내용이 쏙쏙 이해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는 1920년대 베를린의 일상과 당시의 불온한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투어가 기다리고 있고 그 전에 독일 역사박물관에도 가볼 예정이다.
밥을 먹고 막스에게 한국에서 사온 예쁜 책갈피를 주기 위해 단트라에 잠시 들렀는데 막스가 없다. 오늘은 사장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바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녀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대강의 눈치와 분위기로 막스는 오늘 일하지 않으며 화요일에 출근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독일어로 나는 영어로 말하며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했다. 진귀한 경험이었다.
오늘의 마무리는 베를린에서 처음 맥주를 마셨던 요크슐라쉔에서 하기로 했다. 일요일 낮에 브런치 공연이 있다고 들었지만 어느 공연이든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바에 다가가 맥주를 주문하려고 하니 모자를 쓴 무서운 인상의 남자 바텐더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도와줄 거라고 했다. 사실 인사를 하고 얌전히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아서 내가 간 거였다. 순간 당황해서 어버버하니 요리 메뉴까지 필요하냐고 물어봐서 아니 그냥 맥주만 마실 거라고 대답했다. 그럼 뭐 줄까?하는 물음에 사실 나는 여기 맥주에 대해 잘 모르고(독일어로 된 메뉴를 아예 읽을 수 없고 딱히 맥주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마실 줄만 알지) 괜찮다면 너가 추천해줬음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잠시 서 있었다. 내가 버릇없이 자리에 앉아서 직원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감히 바에 와서 직접 주문을 해서 화가 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나는 바깥 자리에서 기다릴... 했더니 다급하게 안돼!하고 외친다.
“여기 이 세 가지 맥주를 마셔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도록. 첫 번째는 아주 보통의 맥주고 두 번째는 흑맥주...”
아주 작은 잔에 따라준 세 종류의 맥주를 마셔보고 기분 좋게 흑맥주로 주문했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순간 긴장했다가 마음을 놓았다. 한잔 가득 따라준 맥주를 받아들고 시원한 바깥 테이블에 앉아 아이패드를 켜고 그동안 밀린 일기를 쓰고 또 다듬었다. 이곳 역시 동네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이용하는 펍이라 할아버지 할머니 손님들도 많았고 자전거 타고 지나가다가 친구들을 만나 멈춰 서서 대화하는 경우도 잦았다. 일요일 꽤 늦은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도대체 베를린 사람들은 내일이 없는 거야? 아니면 다들 일을 안 하는 건가?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져 짐을 챙겨 실내로 자리를 옮겼더니 빈 맥주잔을 본 아까 그 바텐더가 다가와 씩 웃으며 묻는다.
“어떻게 더 필요한 건 없으신지?”
“아까 첫 번째로 시음했던 가장 보통의 맥주 있잖습니까, 그걸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요.”
“좋아요, 흑맥주는 괜찮았나요?”
“네, 감사합니다요.”
“아이구, 별말씀을.”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발음이지만 당케쉔!이라고 감사의 말을 건네는 내게 그 역시 비테쉔!*이라고 경쾌하게 응답해준다. 베를린 사람들은 친절하긴 하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없을 때는 말을 걸기 쉽지 않다. 특히나 게르만 족의 유전적인 특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남자들은 더 그러하다. 언제 어디서나 여자들이 더 빨리 편한 사이가 된다. 물론 술에 취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주 갔던 카페 더블 아이에서 한번 당황한 적이 있었다. 그 좁은 카페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주문하는 줄이 어딘지 헷갈려 하고 있었더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백인 독일 남자가 독일어로 말을 걸었다. 그 역시 손님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영어로 대답했다.
“아켲체하이ㅏ내ㅑㅋ루ㅓ춭픀켜ㄹ?”
“어... 커피 주문하려고 서 있는데요.”
“이 줄은 주문하고 커피 기다리는 줄이에요. 저쪽에서 주문해야 될 거에요.”
“아 네, 저는 여기가 주문하는 줄이라고 생각해가지고...(우물쭈물) 감사합니다.”
“저기서 주문하고 여기서 커피 받으세요.”
그는 분명 헤매고 있는 나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렇게 웃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이 새파란 건장한 남자에게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 더 어려 보였다. 어리고 키 큰 백인 남자에게 혼나는 심정이란. 베를린 사람들이 타 지역 독일인들에 비해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아주 활발한 서비스직 종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첫 만남에서는 별로 미소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평범한 대화를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꽤 기발한 농담을 던질 때도 딱히 웃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나 같은 외국인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온 독일인들도 당황한다고 했다. 뭐지? 나보고 웃으라고 하는 소린가? 근데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지? 나를 놀리는 건가?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당황한 표정으로 어버버하고 있으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농담인 걸 캐치하고 웃어준다면 그제서야 활짝 미소를 지으며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했다. 츤데레도 아니고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여튼 호락호락한 사람들은 아니다만 그들에게 묘한 매력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어로 메뉴판을 읽고 맥주 정도는 주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방인으로 돌아다닐 때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 더 피로감을 느낀다. 오늘부터 맥주 이름 공부해야지. 맥주를 안 마실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뱃살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일요일 밤이었다.
*Taverna NOTOS 직원들이 영어에 서툴긴 하지만 원하는 음식과 맥주를 주문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방문하기 전, 현지어로 음식 이름 정도는 조사를 해가는 편이 주문하기 수월하다.
*그리스식 고리 요리. 터키의 케밥과 요리 방식이 흡사하지만 그리스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삼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옆에 붙어 있는 나라들답게 사이가 좋지 않다. 기로스는 고기와 샐러드 빵 감자튀김 등의 사이드 요리와 곁들여 먹는다.
*맥주에 레모네이드와 탄산수를 조금 섞은 음료. 달콤하고 가볍다. 당 떨어질 때 늘 마셨다. 라들러라는 단어는 주로 독일 남부에서 쓰이는 용어라 베를린에서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베를린에서 더 자주 쓰이는 다른 단어를 배웠는데 또 까먹었다. ‘롸-들러’ 이런 식으로 R발음에 유의해서 발음해야 한다. 바텐더들이 정직한 내 발음을 못 알아들어 두, 세 번 반복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민망했다.
*Bitte schön 천만에요, 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