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다 올리버 칸 때문이야.

7월 26일

by 안나

어제의 우울함이 도저히 가시지 않아 오후까지 가만히 있다가 수경언니와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와이파이 최고시다. 그동안 있었던 일 중에 깨알같이 귀여운 일화를 이야기하고 나니 이 도시에 대한 애정이 조금 살아난 것도 같았다. 오늘 점심이자 저녁은 인도 커리와 갈릭 난으로 정하고 맨날 가는 빈터펠트플라츠* 중 어느 만만한 인도 식당에 들어갔다. 양고기 커리로 배를 채우고 놀렌도르프 플라츠*의 카페 레자(Cafe Reza)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 와중에 커스틴과 밤에 만날 장소를 정하고 예진씨와도 내일 만날 일정을 잡았다. 이제 더 이상 외로운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 커스틴과 헨릭이 퀴즈하는 펍으로 가서 합류했다. 커스틴도 헨릭도 펍 퀴즈 대회를 굉장히 좋아한다. 독일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두어 문제 맞췄다. 오늘 참여한 펍 퀴즈대회는 프란츠 클럽(Frannz Club)에서 매주 주최하는 행사인데 야외의 큰 비어 텐트에서 진행하는데다 사람도 많고 주최 측이 꽤 성의 있게 준비해서 깨알같이 재미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샤키라 노래에 맞춰 상어 인형을 쓴 인간이 어처구니없는 춤을 추는 동영상*을 보며 웃다가 토할 뻔 했다. 누가 독일인들 재미없다고 했냔 말이야. 내가 맞춘 퀴즈는 오지 오스본이 커버한 노래의 가수와 제목을 맞추는 것인데 문제로 나온 5곡 중 엔싱크 노래는 아무도 몰라서 내가 답을 썼다. 이거 맞춘 사람 거의 없었을 거다. 20-30대 평범한 독일 남자들이 엔싱크 노래를 자세히 알 리가 없다. 약간 민망하긴 했지만 뭐 맥주 값은 했지. 누구나 인생 한 때 보이밴드에 열광한 적 있잖아요?


KakaoTalk_20190818_200944757.jpg 깨알같이 모인 사람들. 은근 귀엽다.


3시간에 걸친 시끌벅적한 퀴즈를 마치고나니 펍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맥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함께 떠들기에 완벽한 여름밤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베를린의 클럽이 화제에 올랐다. 베를린의 모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헨릭이 클럽에서 놀다가 인생 퇴갤할 뻔한 환자들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를린에는 주말 내내 문을 여는 클럽들이 꽤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금요일 밤부터 클럽에서 인생을 즐기다가 월요일 오전에나 되어서야 겨우 밖으로 나온다고도 했다. 그럼 밥은 안 먹어? 샤워는 어떻게 하고? 잠은 어디서 자? 눈이 동그래진 내가 질문을 하니 헨릭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다.


“클럽 안에 간단하게 먹을 만한 음식도 팔아. 커피도 팔고. 샤워는 무슨. 당연히 안하지. 다들 엑스터시 같은 약을 먹으니 흥분해서 잠도 안 올 걸. 예전에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 한 명이 실려 온 적이 있었어. 발견한 사람들 말로는 자전거를 타다가 그냥 팍 쓰러졌대. 의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깨어나지 않는 거야. 모든 검사를 다 하다가 마지막으로 CT 촬영을 하려는데 이 남자가 갑자기 헉!하고 깨어났어. 여기가 어디냐, 내가 왜 병원에 있냐. 어디서 어떻게 기절했는지 아예 하나도 기억이 없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당신 도대체 무슨 약을 했냐. 이것저것 섞어서 약을 먹었는데 이틀 밤을 꼬박 새며 놀다가 아침에 나와서 자전거를 탔대. 페달을 밟다가 그냥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야. 아니 그 지경이 되서 자전거 탈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클럽에서 실려 오는 애들 꽤 있어.”


역시 강건한 독일 사람들은 노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는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꼭 자야하며 샤워도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 헨릭과의 대화중에도 한국 사람답게 그럼 밥은 어디서 먹냐며* 끼니부터 챙기는 질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단 말이다.


“와 독일 사람들 대단하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노는 구나. 난 솔직히 첫날부터 엄청 놀랐어. 한국에서 독일 사람들 이미지는 똑똑하고 차분하고 재미없다는 게 지배적이거든. 근데 우리 처음 만났던 그 펍에 들어갔더니 너무 시끄러운데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떠들어서 당황했어. 목소리도 엄청 크고.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수다스럽던데”


“흥, 맞아. 우리 독일인들은 근검절약하고 지루하고 엄숙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재미없는 민족이지. 아니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게 된거야?”


“히틀러 아니야?”


“젠장.”


“내 생각엔 독일인 철학자들과 소설가들 같은데. 칸트나 괴테. 아니면 베토벤?”


“베토벤은 재미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지루한 인간은 아니지. 나도 철학자에 한 표.”


왜 독일 문학과 철학이 이토록 발전하게 된 걸까. 나는 그것에 늘 의문을 품고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독일인들에게 확인을 받을 차례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독일이 문학이나 철학에 세계적으로 한 획을 그었잖아? 나는 그 이유가 날씨에 있다고 보거든. 여름에는 해가 10시에나 지지만 겨울에는 막 3시에도 어두워진다며. 밤이 이렇게 길면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애기 만드는데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그 길고 긴 밤에 소설을 쓰고,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영국도 이런 이유로 수많은 문학 작품이 나온 거 같아. 영국 겨울도 겁나 길고 우울하대.”


“헉...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안나 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겨울밤은 진짜 길고 추워.”

“으으, 철학 수업 진짜 어려웠어.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는데. 역시 독일 이미지는 철학자들 때문인가.”


“나 생각났다! 그 사람. 축구 선수 올리버 칸 때문이야.”


“아!!!!”


나의 통찰력와 커스틴과 헨릭 모두 박수를 보냈다. 올리버 칸. 2002년 월드컵에서 골든볼과 야신상을 동시에 수상한 축구 역사상 유일한 골키퍼다. 만약 외계 행성에 지구인에 대한 데이터를 실어야 한다면 게르만 민족은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의 예시로 당당히 올라갈법한 외모를 소유했다. 독일 사람들이 차갑고 무섭고 자기 분야에서 철저하다는 인상은 단연 이 사람 때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나 혼자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시시껄렁한 주제로 끊임없이 떠들었다. 와 나 영어 잘 하네. 그러다 커스틴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헨릭에게 용기를 내어 나의 이야기를 했다. 언뜻 듣기로 그가 일하는 병동에는 우울증 등 정신병으로 치료받는 환자들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필라테스 선생님이 나보고 살 빼라고 한 얘기 들었을 때 너가 어이없어 하면서 웃었잖아. 굳이 다이어트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랬지. 난 그렇게 생각해. 안나 너가 단백질 파우더까지 먹어가면서 운동한다고 해서 놀랐지.”


“사실 나는 지금 우울증이랑 불안장애로 계속 약을 먹고 있거든. 약간 섭식 장애도 있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예 안 먹거나 아니면 엄청 먹거나. 의사 선생님이 금주하라고 했고. 베를린에서는 알아서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만. 필라테스 선생님이랑 나 말고는 아무도 내 몸무게에 신경 쓰지 않긴 한데, 내 건강을 위해서는 체형 관리를 해야 하거든. 그래서 계속 다이어트를 하는 거야.”


“...내가 아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는데, 그녀 작품을 보면 힘들 때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지금 구글에서 찾아볼 테니 기다려봐.”


헨릭이 보내준 링크로 들어가니 ‘우울증으로의 모험(Adventures in Depression)’이라는 제목의 단순한 그림과 작가의 글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도 될 일이었지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헨릭과는 올 여름에 우연한 기회로 잠시 마주치고 말 사이지만, 나를 몸무게에 집착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볼까 봐서. 조심스레 전하는 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며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헨릭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그 사이 커스틴이 자리로 돌아와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손을 잡아 주었다. 착한 친구들.


다들 엄청 취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정리한 것은 새벽 3시 30분이 넘어서였다. 이 시간에 친구들과 밖에서 놀았던 게 언제였지. 아아 신난다. 기분 좋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헨릭과 커스틴과 헤어져 U반을 탔는데 정신이 혼미한 어떤 아주머니께서 봉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홈리스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가 내 옆에 앉았을 때부터 나는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기껏 마신 술이 다 깨는 경험을 했다. 다행히 그녀의 헛소리를 상대해주는 꽤 친절한 남자들이 같은 칸에 있어서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자리를 옮기면 왜 나를 피하냐고 해꼬지 할 것 같아 꿋꿋이 앉아 있어야 했다. 세상 어디나 정신이 어지러운 사람은 있다. 다만 베를린 사람들은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뿐이다.


살금살금 집에 들어오니 4시 15분이다. 곧 해가 뜰 것처럼 하늘이 밝아온다.

평생 잊지 못할 새벽이다.



* Winterfeldtplatz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광장이다. 주변에 평이 좋은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니 주변에 묵는다면 자주 방문하게 될 장소다. 수요일과 토요일에 마켓이 들어선다.


* Nollendorfplatz 동명의 지하철 역 바로 앞의 광장. 베를린 퀴어 컬처의 상징적인 장소로 CSD 퍼레이드 행렬이 역 주변 도로를 지나간다.


* shakira shark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온다. 상어 옷만 봐도 웃기네.


* 나중에 이 일화를 한국의 지인들에게 전하니 다들 밥은 어디서 먹냐며 걱정한다. 역시 한국인은 밥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