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헤어스타일이 정말로 멋져요!

7월 31일

by 안나

7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다짐했건만 컨디션 난조로 일단 다 포기했다. 여행 중에 생리하기 싫어서 미루는 약을 먹고 있지만 예정된 날짜가 되니 역시 힘들다... 처방약이 아니라 그런 것도 같고. 배도 아프고 속도 쓰리고 머리도 무겁고 만사가 다 귀찮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여행 중에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다시 꼬물꼬물 올라왔다.


어제 잠시 바람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늘 가던 베트남 식당에 가서 굴소스 볶음면과 망고 샐러드를 먹었다. 다 익은 노란 망고 과육이 올라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단한 애플 망고가 무생채처럼 가지런히 썰려서 올라왔다. 고춧가루만 없다 뿐이지 완전 무생채 같은 식감과 맛(!)이라 폭풍 같은 젓가락질로 다 먹었다. 김치, 김치가 먹고 싶다. 유럽 한식당 김치 말고 명동교자 김치 같은 그런 진하고 찐득찐득하고 먹고 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셔야 하는 그런 김치.


잠시 걸어서 꽤 평이 좋은 카페로 왔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산뜻한 분위기의 번화가라 여길 왜 이제야 찾았는지 안타까웠다. 카페 라떼를 한잔 시키고 늘어져 있는 이곳은 Alpenkantine.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모른다. 알펜칸틴? 알펜칸타인? 큰 길에서 빌딩 사이로 난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들어오자 외부의 번잡함과는 완전히 차단된 아름다운 공간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유럽의 공간 활용이다.


적당한 크기의 정원 같은 공간이 있고 삼면 혹은 사면을 따라 건물이 있다. 그 중 한 쪽 벽면에는 기발하고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1층은 카페나 레스토랑이고 나머지는 사무실이나 아파트 같다. 살풍경한 도심의 오피스 빌딩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면 능률이 오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더 늘어질 수도 있겠네.

이렇게 깜찍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구수한 카페 라떼를 마시고 쉬다가 바로 앞 은행에서 유로를 더 뽑았다. 그렇다 나는 여기서 아주 흥청망청 돈을 써대고 있다. 슬슬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안겨줄 선물을 사야 할 것 같아 근처 드럭 스토어로 갔다. 그 유명한 카밀 핸드크림이 0.9 유로다. 하나에 1200원 정도. 도대체 한국에서 얼마나 가격 후려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흥분해서 괜찮아 보이는 핸드크림과 각종 부탁 받은 화장품과 내게 필요한 것들을 마구 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이것이 바로 동양인 관광객의 사재기인가. 계산대에 흩뿌려진 수많은 핸드크림을 보더니 바로 앞에서 먼저 계산을 끝낸 남자가 나를 팔이 수십 개인 부처님인 천수관음보살님인양 쳐다본다. 아 다 제가 쓸 게 아니고 선물입니다. 저는 핸드크림 바르지도 않아요. 어쩌겠어, 님네 나라가 핸드크림으로 유명한 것을.


모두들 베를린에서 핸드크림 떼어다 팔라고 했다

보부상같이 잔뜩 짐을 지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다. 한 정거장 거리지만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정류장 한 구석에 서 있는데 새하얀 은발을 특이하게 따서 예쁘게 정돈한 뿔테 안경을 낀 여자가 독일어로 말을 건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가끔 써먹는 독일어를 꺼냈다. 혹시 베를린의 도를 아십니까 포교 활동을 하는 사람인가. 방금 은행에서 100유로 찾은 건 어찌 아셨는지.



“어어... 카인 도이ㅎ취...(독일어 못합니다요)”


그랬더니 그녀가 활짝 웃으며 영어로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쪽 헤어스타일이 정말 멋져요!”

“네에.....?? 진짜요?(못 믿겠으나 기분은 째짐)”


그렇게 우리는 버스 한 정거장 거리 동안 잠시 대화를 나눴다. 범상치 않은 그녀의 헤어스타일로 보아 혹시 예술 계통에 종사하지 않냐고 물어보니 ‘드레스 메이커’라고 답한다. 디자이너가 설계한 옷 주로 블라우스나 이브닝 가운 같은 옷을 정확히 만드는 직업이다. 어디서 왔냐, 베를린에 얼마나 있었냐, 여기에 공부하러 왔냐, 이 도시는 어떤가 하는 보통의 대화를 나누다가 서울 인구는 몇 명이냐고 물어봤다.


“글쎄요, 아마도 한 천 만 명...?”

“헉”


숨을 들이쉬며 놀라는 그녀가 귀여웠다. 서울은 참 미래적이고 아주 개발된 도시 같다고 해서 자세한 건 나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모든 곳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와 에어컨이 있다고 대답해줬다. 하지만 베를린처럼 휠체어를 쉽게 탑승할 수 있는 버스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에도 저상 버스가 있긴 있지만 실제로 휠체어를 타고 이용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버스에 문제없이 유모차와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점으로만 보면 베를린이 서울보다 더 미래적인 도시인 것은 맞다.


친절하고 호기심 많은 그녀와의 대화로 바닥나 있던 에너지 레벨이 조금 올라왔다. 나는 진심을 담아 덕분에 정말 기분이 좋아졌어요.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라고 공손하게 인사한 후 버스에서 내렸다. 조금 더 같이 이야기를 했다면 더 재밌었을 텐데. 그녀 역시 날 만나서 반가웠고 남은 시간 베를린에서 즐겁게 보내기 바란다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버스에서 내리고 생각해보니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화사한 웃음과 따뜻한 말에 기운을 얻었다.


여행은 낯선 사람의 배려와 관심 없이는 완성되지 못한다.


망고라씨를 마시면 축 늘어진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빈테펠트플라츠의 아시안 레스토랑 파파야에 왔다. 하루에 볶음면을 두 번이나 먹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팟 타이 한 입 먹는 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야외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식당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방콕에서도 종종 이렇게 쏟아지는 폭우를 보며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이게 왠 데자 뷰란 말인가.


마냥 있을 수 없어서 바로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베를린 페일 에일 이라는 맥주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하고 그동안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기를 썼다. 사거리 대로변 코너에 떡하니 있는 카페라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나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구글맵 평점이 현저히 낮은 게 의아할 정도로 멀쩡한 곳이다. 대충 리뷰를 보니 큰 카페에 직원은 달랑 한 명이라 그런 듯하다. 사장이 돈독이 올랐나.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파묻혀 고야드 백으로 출발한 한국의 어린 애기 엄마들에 대한 단상을 쓰다가 일단 접었다. 내 방 창문 밖으로 저 멀리 불빛을 반짝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봤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그런 소재의 글을 쓸 수는 없다. 얼른 나가서 라들러 한 잔 더 해야지. 단트라에 들어가 번개같이 맥주 한 병 원샷하고 옆 테이블의 커플이 신기한 게임을 하는 걸 구경했다.


기다란 이쑤시개 같은 걸 이용해서 수북이 쌓여있는 다른 이쑤시개들을 옮기는 건데 다른 걸 건드리면 안 된단다. 막스가 비번인 날 일하는 바텐더 다니아 말로는 초등학생들이 하는 게임이라던데, 그 말을 듣고 그 커플이 빵 터졌다. 이런 단순한 게임을 하며 꺄르르 꺄르르 소녀들처럼 웃는 걸 보고 이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참 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지는 사람이 술 마시는 거에요?하고 지극히 한국적인 질문을 했더니 다들 또 빵 터진다. 아니 나는 진지했는데... 뭐 그래도 되고 아니면 안 마셔도 된다고.


지난 주 같았으면 같이 대화를 더 했을텐데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너무 피곤했다. 내일은 공예박물관에 가야지. 일요일에는 근처 성당에 가볼까 생각 중이다. 미사에 참석할지 말지 아직 결정은 못 했지만 만약 간다면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건강하시라고 기도하고 촛불을 밝히고 올 생각이다*.



* Eckstein 맥주도 케이크도 무난하다. 무엇보다 테이블이 높아서 문서 작업하기 나쁘지 않았다.


* 이렇게 써놓고 결국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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