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목요일. 머리가 지끈거리고 힘이 없어서 오후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침대 올라가는 복층 계단에 잠시 앉아 있다가 조심조심 내려와서 소파에서 또 잤다. 컨디션이 나쁜 게 아니라 아프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뒤져 적당한 해열제를 찾아 먹었다. 내일은 괜찮아야 하는데.
오후 늦게 이틀 전에 갔던 브런치 카페에 갔다. 다들 추천하는 메뉴인 체다 치즈 와플과 엘더베리 에이드를 먹었다. 고칼로리가 들어오니 뇌에 에너지가 도는 듯했다. 초코 케익도 맛나 보여서 라떼와 함께 디저트도 먹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한참 책 읽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아프면 여행지에서 아무런 의욕이 없어진다. 올해는 감기 몸살로 병원에 간 적이 없어서 조금만 신경 쓰면 아프지 않고 여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곧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베를린의 쾌적한 여름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데 어디 갈 힘이 없다. 어제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서 오늘은 아주 선선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하루였다. 이런 날 브란덴부르크 문이나 티어가르텐을 갔다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베를린에서 가장 멋진 곳을 쉴 틈 없이 볼 수 있었을 것을. 지난 2주 동안 살벌하게 더워서 매일 같이 하루에 샤워를 3번이나 했다. 내가 지금 방콕에 있는 건지, 나쨩에 있는 건지, 베를린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완벽한 날씨가 찾아왔는데 나는 더위를 먹고 몸살이 나서 내 방 소파를 벗어나질 못하네.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더 슬픈 것은 다음 주부터 한국에 폭염이 온다는 사실이다.
올해 정월 대보름에 내 더위를 사간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엄마는 생전에 각종 나물과 과일을 굉장히 좋아하셨고 당연히 정월대보름은 엄마의 그런 취향을 남부럽지 않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절이었다. 대보름날이 되면 아홉 가지 나물을 하나하나 다듬어 조물조물 무쳤고 압력밥솥에 찹쌀을 넣은 오곡밥을 지으셨다. 그러나 오빠와 나는 이미 고기에 길들여진 평범한 한국의 아이들이라 일년 중 이날을 가장 곤혹스러워 했다. 도저히 나물 위주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몇 숟가락 뜨지 않고 식탁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엄마가 매의 눈으로 노려보셨다. 아니 이걸 먹어야 올 한해 건강하다니까! 제발 요만큼만 더 먹어, 엄마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엄마의 정성’이란 말은 모든 상황에 통용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와 같았다. 그러면 오빠와 나는 다시 식탁에 앉아 소처럼 우물우물 나물을 씹어 먹고 후식으로 땅콩을 깨먹었다. 열심히 껍질을 까고 땅콩을 입에 넣으면 마치 다람쥐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밝이술을 함께 마시지 않아 맛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엄마, 안주가 이렇게 많은데 왜 술은 안 주셨나요.
매해 정월대보름 날 아침 마다 비몽사몽 정신없이 있으면 엄마가 기습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안나얏!”
“.... 에?...”
“내 더위 사라이-“
엄마는 내게 당신의 더위를 팔고 박수까지 치면서 신나하셨다. 아이들처럼. 나는 대체로 벙쪄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다행히도 매해 나는 엄마의 더위를 샀지만 그렇게 더위를 많이 타지 않았다. 당연히 나 아프지 말라고 엄마가 복날 마다 펄펄 끓는 삼계탕을 해주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위 때문에 몸이 아프고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건 더 이상 정월 대보름에 음식을 해먹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이상하게 엄마가 많이 편찮아지신 이후에 나도 종종 아프고 여름마다 심각하게 더위를 탔다. 그중 작년 여름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해였고 요새도 더위에 지치면 수술한 부분이 거북할 정도로 아파서 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쉬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 이제 엄마의 더위를 사지 않게 되었는데도 늘 혹독하게 여름을 난다.
올 여름, 이름도 낯선 거리로 가득 찬 이국의 도시에서 종종 엄마를 생각했다.
내 더위 사라,고 소리치던 엄마의 눈에 가득 담긴 장난기가, 사려깊은 엄마 다람쥐처럼 하나하나 땅콩을 깨서 껍질을 까주던 그 작고 가는 손가락이 떠오른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폭염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얌전히 집에 있어야지. 지금의 날 엄마가 보셨다면 맨날 술 처먹고 다니니까 술병 나서 아픈 거라고 불호령이 떨어졌겠지.
엄마, 이 나라에서 맥주는 술이 아닙디다.
작작 마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