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8월 2일

by 안나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금요일. 여전히 감기 기운 때문에 머리가 무겁지만 아플 때 일수록 밥을 잘 먹어야 하기 때문에 부리또 보울을 먹으러 나갔다. 헌데 늘 한적한 동네에 경찰차가 가득 모여 있었고 제복을 입은 경관들도 십여 명이나 있었다. 차 사고가 났나 하고 살펴봤는데 동네 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아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경찰과 이야기하고 있는 세 명 중에 한 명이 전형적인 불량배(표현이 올드하다) 스타일이라 어찌저찌하다보니 싸움이 붙었거니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동네는 터키나 중동 출신의 이민자가 많이 모여 살아서 그런지 묘하게 시끌벅적하다. 좋게 말하자면... 사람 사는데 같다.


여행 오기 전 미용실 원장님께 부탁받은 그 유명한 빨간 치약*을 10개 샀더니 고거 걸었다고 조금 어지러워서 오후 내내 방에서 푹 잤다. 요새 베를린 대기가 불안정한 건지 엄청나게 맑다가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곤 한다. 오늘 오후가 딱 그런 경우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강아지들이 떠내려가는 거 아닐까 걱정했다. 한참 푹 자고 일어났더니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오늘 저녁에 있던 커스틴과의 약속이 내일 오후로 미뤄졌다. 금요일 밤, 아무것도 할 게 없었고 두통은 계속되는데 배는 고프고. 일단 밥은 먹어야겠는데 당장 뭐부터 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전에 한번 들렀던 멕시칸 레스토랑 자파타로 갔다. 오늘은 퀘사디야와 오븐에 구운 통감자를 먹었다. 거대한 잔의 맥주도 함께. 확실히 멕시코 사람들은 음식을 두고 깨작거리지 않는 것 같다. 기분 좋게 취해서 라들러 한 잔만 더 마셔야지, 오늘은 진짜 술 조금만 마셔야지, 굳게 다짐하고 단트라로 갔다. 그동안 쉬었던 막스가 바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근황 이야기를 나누며 막스 여동생의 둘째 아들 사진을 구경했다. 첫째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봤는데, 초등학생이라는 첫째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가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이가 지긋한 두 명의 중년의 아저씨들이 바에 들어왔다. 이미 다른 데서 한 잔 거하게 하시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살았던 동네 주민들이라고. 그 중 나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페터. 그는 80년대와 90년대 아주 유명한 드랙퀸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돈을 벌려고 드랙퀸으로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었어. 요즘과는 완전히 다르단 말야.”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다른 아저씨는 내가 한 번 더 이름을 물어보자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저한테 보여주실 것이 있다고요...??? 갑작스런 상황에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당황하는 내게 막스는 괜찮으니 그를 따라가 보라고 했다. 그는 남자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라이프치히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그의 영화 <AFTER THE FUTURE> 포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그의 이름은 오트윈ORTWIN이었다.


바로 이 포스터.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찍었다.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아이폰으로 포스터를 찍었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 영화 포스터의 사진을 찍는 일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베를린에 와서 정말 별 짓을 다하는구나. 헛웃음이 났다. 오트윈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는 그 영화를 어떻게 하면 찾아서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생각도 잠시, 그는 오늘이 페터의 생일이기 때문에 나도 함께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안나, 근데 지금 뭘 마시고 있지?”


“라들러요.”


“아니, 도대체 넌 뭐가 문제니?? 여기 와서 라들러라니.


하지만 괜찮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연속으로 보드카에 레몬네이드를 섞은 ‘후디니’라는 이름의 샷을 끊임없이 원샷해야 했다. 막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 한 컵만 달라고 했다. 갑자기 부장님과의 회식 자리에 온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오늘은 페터의 58번째 생일이야. 와....우리 진짜 엄청 늙어버렸네. 우리 나이 또래 게이들은 이제 이 동네에 거의 없어.”


함께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내게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던졌는데 혹시 북한에 아는 사람이 없는지, 한국에서는 남자 아이한테 여자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등등을 물어봤다. 아니요, 북한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사실 그러면 잡혀갑니다. 아이 이름은 중성적인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페터에게 드랙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에 그는 편찮으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로 옆 동네에 장성한 조카가 살지만 1년에 딱 한 번 자신의 생일 때만 찾아온다고.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만나기만 하면 자꾸 2차 대전이나 베를린 장벽 등의 이야기만 해서 조카가 뭐라고 했다고 했다. 심지어 페터 본인은 전쟁을 겪어 본 적도 없고 이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웨스트 베를린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페터는 내게도 세계 평화와 환경오염 및 다양한 소재에 대해 한참동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얼굴도 모르는 페터의 조카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잠시동안 강렬하게 존재를 어필한 페터와 오트윈은 술이 너무 많이 취했다며 들어왔을 때처럼 휙 하고 나가버렸다. 보드카를 몇 잔이나 마신 나는 약간 정신이 없어졌다. 간만에 회식한 기분이었다.


물을 마시며 없어진 정신을 찾으려고 하는데 막스가 말했다. 루드빅과 다른 친구들이 바로 요 앞에서 파티하고 있다는데 너도 안 피곤하면 같이 갈래?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 그 유명한 아조나 AJONA 치약. 정작 독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데다 특히 한국인들이 마트마다 쓸어가서 진열대에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도 여기 저기 마트를 떠돌다가 겨우 발견하고 서둘러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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