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청년들은 뭐하고 놀까?

8월 2일 자정

by 안나

12시 바로 옆에 있다는 루드빅네로 향했다. 독일 청년들은 금요일 밤에 모여서 뭘 하고 놀까? 조심조심 거실로 들어갔다. 몇 주동안 오가며 만났던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은 와인을 마시며 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건전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이런 보드 게임을 여기저기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독일 사람들은 모이면 게임하는 걸 좋아하나봐?”


“그런 편이야. 특히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명절에 모여서 같이 게임을 많이 해.”


“...돈은 안 걸고?”


“아니!! 무슨 돈을 걸어!”


아니 그럼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서 술 마시며 게임하는데 돈도 안 걸고 한다고? 한국은 명절 마다 모여서 거하게 술을 마시고 함께 놀다가 결국은 너무 취해서 대판 싸우는 걸로 마무리하는 일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니까 안 믿는 눈치였다. 다 큰 어른들이 화투판 엎고 멱살 잡고 싸우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시각 자료가 없어서 참았다.


새로운 멤버(바로 나)가 그들의 모임에 합류했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가는 게임을 하자고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한 명씩 돌아가며 ‘나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본 적이 있다’라는 문장을 말하면 해당되는 사람은 술을 마셔야 한다고. 그럼 궁금한 사람이 질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주로 평범한 질문들이 나왔다.


나는 경찰한테 체포를 당한 적이 있다.

나는 술이 떡이 되서 밖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나는 택시 안에서 토한 적이 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맥주 15병을 넘게 마신 적이 있다...


그러다가 살짝 수위가 높은 질문이 나왔다.


“나는 동성과 아주 진한 키스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극동 아시아에서 온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셨다. 내가 대충 알기로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동성애자는 없었다. 여자와 단 한 번도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는 내 대답에 그들이 오히려 더 화들짝 놀랐다. 왜 해본 적이 없냐는 물음에 글쎄 왜 해야 하지...?라고 되물었다. 살면서 딱히 그러고 싶은 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몇 번 씩 질문을 하다 보니 대강 사람들의 이름과 개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루드빅의 아파트에 모인 사람은 야스민, 크리스토퍼, 레나, 크리스, 막스, 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었다. 한 번 수위가 올라가자 종종 대담한 질문들도 나왔다.


크리스토퍼 : 나는 하룻밤 사이에 3명 이상과 섹스를 해 본적이 있다.


루드빅 : 잠깐, 한 번에 3명 이상이야, 아니면 그냥 차례대로 3명 이상인거야?


나 : (뭐라고...??)


크리스토퍼 : 한 번에 한 명 씩 했다는 가정 하에.


나 빼고 전부 맥주를 들이킨다. 내 옆에 앉은 야스민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물어본다. 물론 막스가 통역을 해준다.


나 : 하...하룻밤에 3명 이상이라고? 언제 그랬던 거야?


야스민 : 월드컵 때. 독일 월드컵이 언제였더라? 2010년?


나 : 아니, 2006년. 월드컵 경기랑 그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었어? 경기에서 이긴 날이었나?


야스민 : 전혀. 월드컵 시즌에 남자들이랑 섹스하기는 정말 쉬워. 펍에서 축구보는 남자들은 정말 아무나 다 하고 싶어 하거든. 그 때 친구랑 내기를 했었어. 누가 더 많이 하느냐로.


나 : 그...그래서(자꾸 말을 더듬는다) 그.... 그렇다면 몇 명이랑...?


야스민 : 4명!


야스민이 친구와의 내기에서 이겼는지 어쨌는지 듣지는 못했다. 눈앞에서 할리우드 R등급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와 진짜 이런 내기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이 있긴 있구나. 감탄하고 있는데 막스가 질문을 던졌다.


막스 : 나는 애널 섹스를 해 본적이 있다.


나 : (헉.... 숨을 삼킨다. 너무 당황하면 촌스러워 보일까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다)


레나 : 내가 한거야, 아니면 상대방이 나한테 한거야?


막스 : 상관없어.


막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모두 맥주를 들이킨다. 나는 차마 누구에게도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순서가 돌아 내 차례가 되었다. 좋아 나도 무시무시한 질문 해야지.


“나는 남한테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할 페티시가 있다.”


이 문장 하나로 여섯 명의 독일인 남녀들은(나중에 알고 보니 이전에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 크리스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엄청난 토론을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내 질문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들은 페티시의 정의에 대해 갑론을박 했다. 물론 독일어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약 30분간의 폭풍 같은 토론이 끝나고 나서도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한 점은 본인이 가진 페티시인가, 상대방이 내게 행한 것인가에 따라 대답이 갈린다고 했다. 아니 그냥 아무나 생각나는 대로 아무 얘기나 하면 안 되는 거야...? 꼭 이런 걸 다 따져야만 대답할 수 있는 거야? 금요일 밤에 술 마시러 모여 가지고 꼭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하는 거니? 나는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영어도 대강 하는데 너네 나한테 꼭 이래야 되겠니?


점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미안, 제가 잘못 했습니다 독일인 여러분. 이게 다 정확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은 저의 잘못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결국 그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일단 다음 사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는 식은땀이 났다. 아니 왜 놀러 와서 이렇게 심사숙고해야 하는 거지. 혼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다행히 대화는 주제는 유럽의 정치 경제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과학자인 크리스와 베를린 병원에서 사회 복지사로 일하는 야스민이 갑자기 불꽃같은 토론을 시작했다. 아무도 그들의 논쟁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막스는 그들의 이야기 주제가 홱홱 바뀌어서 통역을 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현재 유럽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민족주의와 난민 문제, 무슬림 여성이 서구권에서 히잡을 쓰는 것에 대한 광대한 언쟁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내 앞에서 백분 토론을 찍고 있었다. 물론 독일어로.


약간 심심해진 나는 루드빅의 집을 구경했다. 이 아파트 역시 전형적인 독일의 오래된 아파트라고 했다. 내부 장식이 무척이나 모던해서 잘 꾸미고 산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뭔가 수상쩍은 물체를 포착했다. 벽 한 쪽에 커다란 벽돌이 쌓인 오븐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하며 물어봤더니 난방 장치라고 했다. 스토브라고? 오븐 같아 보이는데?


“응 맞아. 여기다가 나무를 넣어 불을 지피는 거야. 그러면 난방이 되지. 오래된 아파트라 이런 식으로 난방을 해야 해.”


뭐라고? 나무를 넣어서 불을 지핀다고? 21세기 독일 수도에서 그런 전근대적인 장치가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물론 교외에 있는 커다란 주택이라면 전혀 놀라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긴 도심 한복판에 있는 작은 아파트다. 그것도 꽤 잘 사는 동네에 있는. 근데 이거 불 피우면 연기는 잘 빠지는 거야 어쩐거야. 단트라에서도 손님들이 바 안쪽 자리에서 흡연을 하곤 했다. 나중에 보니 그저 창문이 빼꼼 열려 있을 뿐이었다. 처음 그 광경을 보고 막스에게 담배 연기 냄새가 많이 날텐데 환기 시설은 따로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 코웃음을 쳤다. 온갖 편의시설에 물든 인류에게 보내는 애처로운 웃음이었다. 우리 집에는 주방에도 있고 화장실에도 환기 장치가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한국의 위대한 발명품인 가스보일러를 보여주고 싶었다. 자, 이게 전형적인 한국의 난방 장치야. 이 버튼으로 집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지. 바닥부터 따끈해진단다. 그래서 겨울에는 방바닥에서 떨어질 수가 없어. 참고로 물의 온도는 이 버튼으로 조절한다고. 겨울에 하루 종일 집을 비울 때는 외출 모드로 해놓는단다. 그 편이 난방비가 덜 나오거든. 그러고 보니 한국 가면 가스 검침 받아야 하는 구나.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났다.


약간의 문화 충격을 받은 후 다시 소파에 돌아와 앉아 있으니 크리스와 야스민이 대화를 잠시 멈추고 와인을 한 병 더 따서 마시고 있었다. 처음 독일에서 마신 맥주가 생각보다 도수가 낮아서 사실 나는 독일인들을 만만하게 봤다. 게다가 독주랍시고 가져온 것은 페퍼민트 슈납스라는 맑은 술이었는데, 치약 맛이 나는 진한 풍미의 음료였고 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야, 독일 사람들 술이 약하고만. 등치는 커가지고. 실망이야,하고 속으로 의기양양했는데 엄청난 양의 맥주를 쉴 새 없이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얘네 진짜 맥주 어마어마하게 마시는 구나. 두 잔 이상 마시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입에 대지 않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루드빅이 제발 자신이 요리한 닭 좀 먹으라고 난리다. 배불러. 저리가. 과하게 알콜을 섭취한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모두 맛이 가고 있었다. 야스민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레나는 남자친구인 크리스와 맥주를 더 사러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축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