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Nov 19. 2022

책받침

지금은 거의 사라진 '책받침'이란 학용품이 있었다.

새 학기 새로 꾸린 책가방 속에 필수로 들어있던 책받침.

사실은 공책받침이나 종이받침이란 표현이 더 맞다.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A4 용지 만한 책받침을 공책 갈피에 끼워 낱장을 받치고 필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전 책상들의 표면은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책받침 없이 글씨를 쓰다가는 종이가 찢어지거나 구멍이 뚫리기 일쑤였다.

연필도 질 좋은 게 많지 않아 책받침을 받치고 글씨를 쓰는 게 훨씬 편했다.

얇은 종이에 굵은 사인펜이나 매직펜으로 글씨를 쓰다 보면 뒷장까지 금세 번지곤 했다. 볼펜이 시키지도 않은 응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책받침의 역할은 대단했다. 온몸으로 번짐을 막아낸 책받침은 자신의 몸에 생긴 얼룩을 마치 훈장처럼 뽐내는 것 같았다.

가끔 자 대신 책받침을 대고 줄을 긋다가 선생님께 혼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자 쓰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할 때 책받침으로 삐뚤빼뚤 그리고 있는 아이들이 안 되겠다 싶어 나무라셨지만, 그어놓은 선만 보아도 자를 사용한 것인지 책받침을 쓴 것인지 구별해내시는 선생님의 능력이 나는 무척 부러웠다.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책받침의 용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쓰던 책받침엔 당시 인기 있던 만화영화 캐릭터나 구구단 같은 것들이 있던 반면, 고등학교 때는 유명한 해외 연예인들의 사진을 래미네이트 해서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녔다. 시와 삽화가 함께 있는 예쁜 그림도 책받침의 대상이 되었다. 모으는 재미로 가지고 다녔을 뿐, 책받침으로는 거의 쓰지 않았다.

나는 책받침 왼쪽 윗부분에 펀치로 구멍을 뚫어 여러 장을 링으로 연결해 가지고 다녔다. 쉬는 시간엔 친구들과 서로서로 책받침 구경 삼매경이었다.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올리비아 핫세 등의 사진들과 '목마와 숙녀(박인환)', '꽃(김춘수)', '행복(유치환)' 같은 시가 적힌 종이들이 우리의 책받침 스타가 돼 주었다. 공부하다 이들을 들여다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게 곧 달콤한 휴식이었다.

학교 앞 문구점은 빼곡히 걸려 있는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래미네이트 하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이 되곤 했다. 우리 학교 앞에는 구하기 힘든 해외 배우의 사진들만 전문으로 주문 판매하는 가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래도 내게 책받침은 여전히 공책의 단짝으로 기억된다.


영어 표현 하나가 생각난다. I got your back. '내가 있잖아'라는 뜻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에게 이 말 한마디는 감동이자 위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Fall back on something'이란 표현도 있다. 뒤로 넘어져도(fall back) 뭔가(something) 나를 받쳐주는 것처럼 기대거나 의지할 데가 있을 때 이 말을 쓴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책받침이 공책의 든든한 뒷받침이 돼 주고, 스타들의 사진과 고운 시로 공부에 지친 내게 위로가 돼 줬듯, 지금 내 등을 받쳐주며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하고 말해줄 사람이 있을까.

그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You deserve a pat on the back." - 넌 칭찬받을 자격이 있어.

넌 멋져, 토닥토닥.


사진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비움의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