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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Dec 15. 2022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며

삼계절 반을 벽장 안에서 쿨쿨 자던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냈다.


하우스에 살 땐 제법 키가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아이들과 낑낑대며 지하 창고에서 트리 상자를 꺼내 위층 거실까지 옮기곤 했다.

남편이 트리를 세우고 매만지는 동안, 나는 민트색 상자를 열고 안에 담긴 트리 장식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들어 온 장식들부터, 성경을 가르치던 아이들한테서 선물 받은 장식들 -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모양으로 빚은 점토를 직접 구워 만든 것도 있고,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정성스레 그려 래미네이트한 장식도 있다 - 과 이웃, 친구들에게서 받은 성경구절이 담긴 장식들, 갖가지 종 모양과 천사도 있었다.


2년 전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키 큰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져올 수 없어 기증을 했다. 무거운 트리를 힘들게 옮길 일이 없어져 홀가분했지만, 한편으론 몹시 허전하기도 했다.

이사 온 해, 남편과 나는 테이블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의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샀다. 건전지 여섯 개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여러 가지 색의 불빛이 번갈아 반짝이는 예쁜 트리다.

올해도 트리를 꺼내며, 민트색 상자도 같이 꺼낸다. 지금의 키 작은 트리엔 달 수 없는 장식들이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상자를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 장식들이 마치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처럼 빼곡하게 들어있다. 나는 또 언제나처럼 그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추억에 잠긴다.


나에게 첫 영어 선생님이 되어 준 제니퍼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만삭의 몸이었다. 내가 시카고로 이사 오고 나서도 아들 케일럽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매년 보내주곤 했다.

직접 구운 쿠키를 나눠주고 우리 아이들을 예뻐해 주던 옆집 메리 할머니와 네이든 할아버지, 자연주의자라며 잔디를 깎지 않아 정원이 울창한 집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살던 뒷집 존 아저씨, 연말에 이웃을 모두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 주었던 제니 -  모두 마음씨 고운 이웃이었다.

영어 클래스에서 만난 S와는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손글씨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다. 비행기 공포가 심해 여행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그녀는 내가 사는 이곳도, 심지어 아들이 대학에 다니던 동부에도 한 번도 못 갔다. 통화를 할 때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밝고 천진한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그곳을 떠나온 15년 전과 똑같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러 가봐야겠다.


며칠 전 니키한테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그녀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을 때마다 매년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모습이 신기했다.

니키는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둘째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ESL 교사(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의 영어 학습을 도와주는 선생님)였고 나와 친구로 지냈다. 니키의 딸 둘이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라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어느 여름, 초등학교에 다니던 니키의 둘째 딸 얼리나와 내 둘째가 니키네 집 앞에서 레모네이드를 팔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둘이서(물론, 니키와 내가 옆에서 지켜보긴 했다) 레모네이드를 잔뜩 만들어 집 앞에 가판대를 차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 달고 시원한 레모네이드가 25센트요!"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이 귀여웠는지 한 잔씩 사주었다. 그렇게 레모네이드를 다 팔아치우고 번 돈을 나누는 두 아이의 넉살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니키네 집에 가면 나무 향기와 함께, 계피를 넣고 뜨겁게 데운 애플 사이더 냄새가 났다. 니키네는 매년 농장에 가서 진짜 나무를 사다가 트리 장식을 했다. 벽난로엔 니키의 남편 타이보가 만들어 놓은 장작을 땠다. 따뜻하고 고전적인 느낌의 크리스마스를 니키네 집에 가면 느낄 수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문화 속에 내던져져 당혹스러웠던 시절을 함께해 준 이웃, 친구들의 얼굴이 오랜만에 꺼내본 크리스마스 장식들 위로 겹친다.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사람들이다.

미국에 와 처음 살던 오레곤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 차로 두 시간만 달리면 태평양이 보이는, 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곳이다.

영하의 기온이 거의 없어 눈이 오지 않는 포틀랜드의 겨울에 어쩌다 눈이 오면 동네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아무도 며칠이고 눈을 치우지 않았고, 누구든 썰매를 가지고 나와 어디서나 탔다.

1년 반밖에 살아보지 못한 그곳이 눈 많고 추운 이곳 겨울이면 유난히 그립다.

"어디나 처음으로 살게 되는 곳이 고향이랍니다." 누군가 내게 말해줬다. 정말 그런가 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살던 서울, 그리고 생전 처음 살아본 타지 포틀랜드 모두 내겐 고향이다.


연말이 되면 왜 그리운 사람들을 추억하게 되고 만나고 싶어 지는지 알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생일의 주인공 아기 예수는 사랑 그 자체였다. 누구나 너그러워지고 누구나 기쁨에 넘치며 누구나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자 안 장식들 중 무게가 덜 나가는 조그만 장식들을 트리에 걸어 본다.

사랑으로 부푼 설레는 내 마음도 거기 함께 얹어본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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