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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an 14. 2023

봄의 환상

I Can Love You Like That

아침에 눈을 뜨니, 테라스로 난 창에 파란 하늘이 가득했다. 새해 들어 처음 보는 파란색 하늘이다.

하도 오래 파란색을 잃어버린 하늘이어서, 차라리 그 구름빛 하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시 제 색깔을 찾은 하늘, 게다가 연말부터 계속 포근한 날씨가 자꾸 손짓하는 듯했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해야?"

주차장 문을 연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부신 눈을 깜빡이며, 들뜨는 마음도 숨길 수 없었다. 제 빛을 찾은 하늘도 존재감 확실한 태양도 반가웠다.

남편이 잠시 은행에 볼일 보러 들어간 사이,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차에 앉아 있었다. 될수록 오래 햇볕을 쬐고 싶었다.


야트막한 은행 건물 위로 파란 하늘과 마치 실루엣 같은 겨울나무가 보였다.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갈라놓은 하늘 모양 칸칸이 가지각색의 그림인 듯했다.

구름도 나무도 그림을 잘 그린다. 그들이 하늘에 그려놓은 그림은 마음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은 하늘뿐 아니라 내 마음에도 그림을 그리는지 모르겠다.

그때, 라디오에서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다 ⎯ All-4-One의 'I Can Love You Like That'.

그대가 나의 연인이 되어 준다면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그대를 사랑하겠다는 노래다. 나의 전부는 그대이니 온 마음으로 그대를 사랑하겠다는 노래다.

사랑을 구하는 간절한 목소리가 아름다운 노래에 실려 들려왔다.

그 달콤함에 잠시 취하는 순간, 따뜻한 봄날에 와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겨울이 아닌 봄 같았다.

어느 봄날 개나리 진달래 가득한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깔깔대며 사진을 찍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던 봄 냄새가 코끝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대학 첫 축제를 동아리 장터에서 순대 썰다 다 보낸 허무했던 5월도 생각났다.

두 달 사귄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냈던 3월도 있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T. S. 엘리엇의 시도 생각났다. 시처럼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봄꽃이 흐드러진 캠퍼스를 걷던 날도 있었다.


봄은 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봄을 뺀 나머지 계절 이름 앞에 '새'라는 글자를 넣어 말하지 않는다. 오직 봄만이 '새'봄일 수 있다.

꽃이 피어나고 대지가 색깔을 입어 가는, 세상에 다시 온기가 살아나는 봄은 시작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봄에 곧잘 사랑을 말한다. 봄엔 마음껏 사랑하기를 바라고,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을 축복하기도 한다.

새로움의 설렘과 사랑의 속삭임이 봄바람에 스며든다.


아직 겨울이 한창인 1월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 파란 하늘을 보며, 달착지근한 사랑 노래를 들으며, 나는 잠시 봄 꿈을 꾸었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은 나의 상상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겨울의 시작부터 봄을 기다려 왔기 때문일까.

글을 쓰기에 느낄 수 있었던 한겨울 속 봄날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 순간도 내 의식 어딘가에 머물렀다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X1RphRL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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