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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Feb 12. 2023

안녕, 시카고

Farewell, Chicago!

어둠 속 하얀 허허벌판 ⎯ 공항에 내려 처음 본 시카고의 모습이다. 16년 전 1월 어느 날이었다.

마중 나온 남편의 동료 S 씨, 오래전 서울에서부터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그가 물었다. "화났어요?"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너무 추워 빨갛게 얼어터진 두 볼, 굳어버린 입, 똑바로 뜨기 힘들었던 눈이 꼭 화난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남편은 칼바람에 눈이 쓸려, 슬픈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시카고의 첫인상은 하얗고 혹독했다.


저 멀리 서쪽에서 출발한 이삿짐이 일주일 만에 도착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전학 절차를 완료하고 각각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남편도 출근을 했다. 이삿짐과 함께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정리에 여념 없는 날들을 보냈다.

그로부터 2년 전, 생전 처음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와서 천장까지 쌓인 이삿짐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생각났다. 짐들을 내려놓고  떠나는 이삿짐센터 아저씨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어느새 이사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미니멀리스트까진 아니더라도 생활의 간소화를 선호하는 나는 이사든 여행이든 짐을 많이 끌고 다니는 편이 아니다.

가뿐하게 집 정리를 마친 나는, 그러나 길고 깊은 이곳 겨울에 갇혀 한동안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춥디 추운 겨울 한가운데 별안간 온 우리는 두꺼운 겨울 외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겨울에도 얼음과 눈이 없는 곳에서 2년을 살다 왔기 때문이다.

학교 휴식시간에 바깥에 나가려면 스키복과 같은 스노 재킷과 스노 팬츠, 스노 부츠가 있어야 했다. 겨울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눈 위를 굴러다녀도 될 만한 이 두꺼운 옷과 부츠를 학교 개인 사물함에 갖다 넣어놓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처음 며칠, 나는 이 옷과 신발을 어디서 사야 할지 몰라 챙겨 보내지 못했다. 아직은 친해지기 전, 혹시 아동학대로 의심을 살까 봐 아이들 선생님을 만나 설명하던 기억도 난다.


3월을 지나 4월이 되니 눈이 녹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무심코 창 밖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 앞이 이랬나? 싶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걷힌 사이로 드러난 푸른 잔디가 여태까지 살던 곳이 아닌 느낌을 주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겨우내 얼마나 눈에 묻혀 살았는지 그때야 실감이 났다.

차로 5분만 달려도 산길이 나오는 예전 살던 곳과 딴판으로, 이곳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산이 없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서버브 지역이라 높은 건물도 없어 어디에도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 줄 방패가 없다. 고스란히 껴안아야 했던 북풍한설은 나로선 감당하기 힘든 시카고의 성격이었다.

주말에 가끔 나들이 갔던 다운타운은 도시를 좋아하는 내겐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다. 시카고 다운타운은 건축의 도시답게 멋있는 빌딩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미시간 호수로 알려진 곳이다. 오래전 미시간 호 선상에서 본 불꽃놀이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


이제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

아이들과 가까이 살고 싶어 우리는 용기를 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무지개를 찾아 떠나는 전사처럼, 나는 봄을 한발 일찍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 40대를 모두 보내면서도 정들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막상 떠나려니 서운한 마음이 든다.

겨울에 왔다 다시 겨울에 떠나게 된 시카고. 아픔도 행복도 빠짐없이 가져다줬던 이곳에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한다.


안녕, 시카고.

Farewell, Chicago!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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