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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06. 2023

이사와 라디오

New York New York 4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 도착이라던 이삿짐은 여섯 시를 삼십 분이나 넘길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하루종일 기다림과 굶주림에 지쳐있던 남편과 내가 햄버거로 저녁을 때울 때쯤, 천천히 기울던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결국 사방이 캄캄해지고 나서야 트럭이 도착했다.

일방통행 도로 양 옆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트럭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아 늘 몸살을 앓는 곳이다. 밤중에 이삿짐을 들여보긴 머리털 나고 처음이지만, 통행량이 적은 때인 건 다행이었다.


짐을 들이고 박스를 모두 오픈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계약조건 2주를 거의 꽉 채우고서야 짐이 도착했고, 유리 하나가 깨졌으며 박스 하나가 분실됐다. (나중에 짐 정리를 하다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분실된 박스 안에 있던 찜질팩이 몹시 아쉬웠다.)

기다리는 동안 짐을 모두 잃어버리는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했던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지 나 자신을 다독였다. 손상과 분실에 대해서는 이삿짐 회사에 클레임 하기로 했다.

이삿짐 회사 직원들이 모두 떠나고, 발 디딜 틈 없는 집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도망치듯 침대로 들어가 기절하듯 자버렸다.


다음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부엌 카운터탑 위에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는 순간 울고 싶어졌다. 며칠이 걸릴지 모를 집 정리에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부엌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수납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치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 틈마다 짐을 욱여넣다 보니 몸도 힘들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평상시 잘 쓰지 않던 근육을 풀어주는 것처럼, 자주 쓰지 않던 물건들과 조우하게 되는 게 이사의 묘미인 것 같다. 그 물건은 계속 거기 있었을 뿐인데 그의 존재를 새로이 마주한 순간,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호들갑을 떤다. 가끔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뜨악한 심정이 될 때도 있다.   

며칠을 돌보지 않은 내 모습이 끔찍할 것 같아, 거울을 보는 대신 창 너머 바깥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맑은 햇살 아래 강아지와 산책 나온 사람들, 빵이 든 봉지와 커피를 들고 어딘가 바쁘게 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서 정리를 마치고 나도 이른 봄볕에 한들한들 산책 나가고 싶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미국에 처음 온 무렵 구입했을 CD 카세트 라디오가 있다.

CD 몇 장과 고등학교 때 친구가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도 가지고 있어, 그들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이 CD 카세트 라디오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라디오를 들어 보고 싶어 채널을 여기저기 틀다 얼핏 한국어를 들었다.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들어보니 틀림없는 우리말 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뉴욕 라디오 코리아(KRB)'라는 한국어 라디오 방송이다. 미국 라디오 채널에서 방탄소년단(BTS)의 노래가 나올 때도 신기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우리말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다니 감동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자잘한 집안일을 하며 듣기에, 교민들에게 유익한 여러 가지 정보와 뉴스, 추억을 부르는 옛 노래들이 흘러나와 좋다.

집 근처를 산책하다 한국분이 운영하는 식당과 카페도 두 군데나 발견했다.

뉴욕에서 보이는 우리나라, 정답고 따뜻하다.



✳︎ '헬로, 뉴욕''아파트와 리쿠르트''지하철과 딤섬' 등 저의 뉴욕 이야기가 담긴 글은 <데일리 뉴욕>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ailyn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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