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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20. 2023

글쓰기, 그리고 나

낮도 아니고 그렇다고 밤도 아닌 것 같은 시간에 혼자 깨어 있었다.

장르가 호러라는 영화를 보며 아무 공포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앉아있었다.

호러영화에서 느낀 호러의 부재 ⎯ 아이러니하다는 그럴듯한 포장 말고, 호러 장르를 완성하는 진짜 호러 같은 글을 써보고 싶었다.


언제부터 나 스스로를 글쓰기에서 떼어내기 시작했는지가 생각났다.

대학 1학년 ⎯ 정치도 사회도 몹시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기보다 거리로 뛰어나가는 학우가 더 많던 시절이었다.

갓 입학한 대학은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는 거대한 소리통 같았고 그 울림은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첫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거부되었으며, 학교 곳곳의 벽은 대자보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대자보 ⎯ 누군가 매직펜으로 굵직굵직 채운 커다란 종이 앞에 나는 한참을 서있곤 했다. 나라의 현재 상황과 이에 대한 의견이 담긴 벽보 앞에 얼어붙었던 이유는 충격과 부끄러움이었다.

개인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글, 현실을 직시해 피를 토하듯 쓴 글들 앞에서 나는 오히려 조금씩 무너져 갔다. 싸구려 감성팔이 같던 내 글에 나는 부끄러움으로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놓아버렸다. 그 부끄러움이 상처로 남아 글과도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보다 힘도 세고 아는 것도 많은, 나를 초월하는 존재가 늘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기준은 고귀해 쉽게 다다를 수 없었다. 절망스럽고 힘겨웠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그는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용서도 자비도 없었다.

가까스로 다시 일어나면 그의 기준은 어느새 한 뼘 더 높아져 있었다. 한 순간도 편안하거나 즐겁지 않았다.


바닥이 만져질 무렵, 나는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둠 컴컴한 협곡에서 빛을 품은 절벽 위를 바라보며 글을 썼다. 글은 내게 치유이자 화해였다.

그리고 내 안의 작은 아이를 만났다. 여섯 살에 멈춰 더 이상 자랄 수 없었던 아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그 아이는 점점 자라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도 갔다. 이제 소녀가 된 아이는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 나를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


비쩍 말라붙어 있던 마음속 샘물이 송송 솟아남을 글을 쓸 때마다 느낀다.

계속 쓰는 것밖에 달리 길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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