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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0. 2023

유리잔의 노래

글을 쓰며, 무뎠던 감각이 살아나기도 하고 뾰족뾰족 예민해 나 자신을 힘들게 하던 것들은 숨이 죽기도 한다.

때로 이런 내 안의 감각, 감정의 변화들 때문에 새로운 힘겨움이 몰려들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나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달콤한 추억 짚기나 푸근한 위로만은 아닌 것이다.


시간과 글쓰기의 공통점은 자연스레 생겨나는 치유의 힘이다. 그 힘은 희망으로 이어져, 무기력한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세상은 밝은데 나는 어둡거나, 나는 밝은데 세상은 어두운 것 같은 이 불일치의 반복을 시간 속에 녹여낼 수 있는 게 글쓰기다.


옛날 누군가 내게 투명한 유리잔 같은 인상을 가졌다고 말했다.

왠지 잊히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중에 문득 생각나곤 하는 말이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리 해석되기도 저리 해석되기도 했다.

오늘 또 그 말이 떠올랐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보여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투명한 유리잔.

그런데, 있는 대로 다 보여줘도 사람들은 각자 달리 보고 달리 말한다. 참 신기한 일이다. 분명 내 안의 일들인데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래서 글을 쓸 수 있나 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음악가가 작곡을 하듯, 글 쓰는 이는 자신의 안에 고여 드는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나 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읽는 이 각자의 세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야기가 불러들인 영감은 또 다른 이야기를 낳으며 세상은, 사람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유리잔은 자신과 비슷한 순도를 지닌 맑은 잔과 부딪칠 때 청아한 소리를 낸다. 부딪침으로써 세상에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세상 모든 건 부딪칠 때 소리를 낸다. 사람의 목소리도 폐에서 올라온 공기가 후두를 거칠 때 성대의 근육들이 서로 부딪쳐 떨려서 나는 것이다. 부딪침과 떨림과 울림에 의해 소리가 만들어진다.

내가 쓰는 글도 부딪침, 만남으로 생겨나 누군가의 마음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작은 울림이나마 되면 좋겠다. 청아한 마음의 여운이 되면 좋겠다.


유리잔은 단단한 곳에 조금만 세게 부딪쳐도 산산조각이 난다. 한번 깨어지고 나면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깨진 조각이 되어 그 날카로움을 드러내고 만다.

세상 밖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남기는 날카로움과 자유함이 결국 글을 쓰는 궁극점 일지 모른다.

깨진 조각 하나하나에 담길 무형의 무언가를 만드는, 그래서 기억되길 바라는 작업이 글쓰기일 것이다.


우연히 지나치던 길에서 한 연주자의 음악을 들었다.

그가 연주하는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이 금방 비가 쏟아질 듯한 흐린 하늘과 마치 하나가 된 듯했다. 길을 가다 말고, 나는 연주에 매료되어 넋을 놓고 서있었다. Mesmerized, Mesmerized, Mesmerized! 그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최면에 걸린 듯 음악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가 연주에 몰두하고 나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듯, 나도 글을 쓰며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의 연주자에게서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쓸쓸한 게 아니다.

가능성이다.

새로움의 창이 열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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