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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01. 2022

작은 병상 일지

초등학교 4학년 초, 3월의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왼쪽 복숭아뼈 언저리가 아팠었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오른쪽 구두 옆부분에 왼쪽 복숭아뼈를 부딪쳤는데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놀이에서 빠지기가 싫어 꾹 참고 놀다 집에 와서 보니 복숭아뼈 부위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부어오른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밤새 끙끙 앓았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도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며칠 더 지켜보기로 하고 집에 왔다. 그러나 며칠 동안 통증과 부기가 더 심해져 아예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엄마 등에 업혀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입원을 권했다.

그로부터 40일간의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1인실이나 2인실 병실을 원했지만 빈 병실이 없어, 우선 자리가 하나 있던 6인실로 입원을 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환자 다섯, 보호자 다섯 모두 열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낯선 관심과 기대의 시선... 낯선 걸 힘들어하는 나였는데 왠지 그 시선들이 싫지 않았다.

"은희는 좋겠네, 또 꼬마 손님이 와서..." 한 아주머니가 내 옆자리 언니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내 침대에 나만한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가 퇴원한 후 쓸쓸해하던 언니는 나를 만나 너무 좋아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회복된다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다.

가운데인 내 침대 왼쪽엔 은희 언니가, 오른쪽엔 근육암 수술을 받은 20대의 젊은 수녀님이 있었다. 맞은편 침대엔 교통사고 후 여러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주머님 두 분과 화상 치료를 받던 9개월 아가 선례가 있었다. 선례 발음이 어려워 모두 '선녀'라고 불렀다.

각종 검사를 거쳐, 내 병은 단순한 그러나 심한 근육 염증으로 밝혀졌고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드레싱을 수술 부위가 아물 때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겪는 고통은 선녀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골집 작은 부엌에서 엄마 등에 업혀있다 선반 위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은 아기는 치료의 고통에 매일 목이 쉬도록 울었다. 선녀의 엄마는 자신도 등에 화상을 입은 채 아이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다. 다행히 선녀는 치료를 잘 마치고 몇 번의 피부이식 수술만 남겨놓은 채 다른 병실로 갔다.


입원하고 1주일쯤 됐을 때 1인실에 자리가 났으니 옮기자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싫다고 했다. 벌써 다른 환자, 보호자들과 정이 들대로 들어 있었다.

다들 불편한 몸으로 집에 있는 가족 걱정, 수술을 앞둔 불안감에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병실은 늘 즐겁고 활기에 넘쳤다. 같이 붙어 있으면서 밥도 같이 먹고 선물을 받으면 나누면서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지냈다. 누군가 수술을 받으러 가게 되면 "잘 다녀와" 이러면서 모두 응원하고 힘을 주었다.

올케가 당신 집에 왔다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몇 달간 올케의 보호자를 자처한 시누님도 있었다. 그분이 우리 병실 오락부장이었다. 그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남의 사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쓰고 읽는지도 모른다.


다리 근육에 암이 생겨 수술을 받은 수녀님은 늘 말소리가 곱고 차분했다. 그런 수녀님이 내 눈엔 그냥 환자복 차림의 언니 같았다. 병실 사람들이 뒷동산으로 쑥을 캐러 간 어느 짙은 봄날, 나는 수녀님이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아파서 우는 걸까, 내가 뭘 도와드려야 하나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모른 척 침대에 누워 붕대 끝으로 삐져나온 내 발가락들을 쳐다보면서 수녀 언니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은희 언니의 한쪽 다리엔 부서진 뼈 대신 철심이 박혀 있다고 했다. 언젠가 언니가 사고 나던 날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퇴근길에 동료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에 서지 않고 달려온 차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근데, 나랑 같이 다친 애는 차랑 부딪치는 순간에 '아~' 하고 있었나 봐."

"왜?" 나는 이건 뭔 소린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 나중에 보니까 걔는 다른 덴 괜찮은데 이만 싹 다 나갔더라고, 이가 하나도 없는 거야. 하하하" 언니는 허리를 못 펴고 웃어댔다.

언제나 밝고 착했던 언니가 없었다면 내 입원 생활은 훨씬 우중충했을 것이다. 언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우리는 어디든 함께 갔다. 언니는 물리치료만 받는 단계라 겉으로 봐선 전혀 환자 같지 않았다. 따라서 가끔씩 병원 탈출을 감행하곤 했다. 우리는 부탁받은 적도 약속한 적도 없었지만, 간호사들이 밤에 언니를 찾으면 한마음으로 둘러대 주었다. 간호사 언니들도 짐짓 모른 척해주는 듯했다.

내가 퇴원하던 날, 눈물을 꾹 참느라 빨개진 언니의 눈자위와 앙 다문 입술이 생각난다. 병실 아주머니들이 그런 언니를 안쓰러워하며, 오래 입원하면 떠나보낼 일이 많아 섭섭하지만 병원에서 헤어지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언니의 하얗고 동그란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퇴원하고 몇 개월쯤 지나 친구 집에서 놀다가, 받아 두었던 수녀 언니의 주소가 그 근처인 게 생각나 찾아가 보았다. 부산의 수녀원에 있는 수녀님은 만날 수 없었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혼자 흐느껴 울던 언니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았었는데, 건강해졌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퇴원하고 한참 동안 병실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어린 나에게 사랑이 뭔지 보여 주셨던 분들. 지금은 모두 나이가 많이 드셨겠지. 어디선가 열심히 사랑하며 잘 살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하늘엔 별이 있고 땅 위엔 꽃이 있듯이 사람에겐 사랑이 있어 아름답다는 괴테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별보다도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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