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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6. 2023

산책

뉴욕으로 이사 온 후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게 있다. 바로 산책이다.

전에 살던 시카고 서버브는 걷기보다 자동차로 다니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공원을 찾아 들어가지 않고서는, 걷기엔 주변이 삭막했다.

지금 사는 동네는 마치 서울 어느 거리처럼 아기자기하다.

길가까지 차지한 과일 좌판이며 식당의 아웃도어 테이블들, 작은 카페, 학교 놀이터, 교회, 크고 작은 식료품점까지 다양한 곳들이 즐비하다.

길을 걸으며 아이들의 귀여운 말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유아차에 탄 아기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보호자를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처음엔 동네 분위기를 익히려고 걷던 게 이젠 중요한 일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비교적 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파는 가게는 어딘지 알게 됐다.

얼마 전 발견한 우리 집에서 2분 거리 피자집은 값도 싸고 양도 많다. 피자 말고도 샐러드, 파스타, 버거, 칼조네 등 메뉴가 예순 가지도 넘는다. 산책하다 가끔 출출해져 들어가는 가게엔 언제나 세 명의 요리사가 각자 맡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진열장 안의 피자를 고르면 바로 오븐에 따끈하게 데워주고, 치킨 샐러드에 들어가는 치킨은 그 자리에서 구워준다. 부드럽고 매끈매끈한 면에 끼얹은 토마토소스가 일품인 이 집 라자냐가 자꾸만 생각나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이웃집 아담한 정원에 핀 고운 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지나다 들른 카페에서 라테 한 잔을 들고 나와 천천히 걷기도 한다. 밝은 여름햇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적당한 소음 속에 걷고 있으면 마음속 잡동사니가 스르르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가끔 서울 어느 곳과 비슷한 장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그곳에 한참을 머물며 사진을 찍고 추억에 잠겨보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좀 먼 곳으로 다니던 나를 아침마다 학교에 바래다준 건 아빠였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많이 걸어 다녔던 이유다.

아빠는 걷는 걸 참 좋아하신다. 팔순이 넘은 지금도 하루 50분씩 꼬박꼬박 걸으신다. 그런 아빠를 닮아서일까. 나도 걷는 게 좋다. 걸음도 꽤 빠른 편이다.

별로 말이 없던 아빠는 그래도 내 손은 꼭 잡아주셨다. 언제나 뒷짐 진 손 중에 한 손을 펼쳐놓고는 앞장서 걸으셨다. 뒤에 걷던 나보고 얼른 와 그 펼친 손을 잡으라는 뜻인 걸, 아빠와 몇 번이나 함께 걸어보고서야 알게 됐다. 차마 먼저 손을 잡아주긴 어린 딸인 내게조차 쑥스러우셨던가 보다.

그렇게 아빠 손을 잡고 나면 나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든든해져 보무도 당당하게 아빠와 나란히 걷곤 했다.


어릴 때 아빠와 함께 걷던 길이 지금의 산책길에 포개어질 때, 마치 시공을 초월한 듯한 신비한 느낌이 든다.

산책 길은 내게 추억이고 여유다. 걸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아 부러울 것 없는 기분이 된다.

그리고 마음 부자가 진짜 부자라는 확신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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