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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15. 2023

핑크 하우스

영화 <13 Going on 30>를 보고

오래전 봤던, 그리고 보고 또 봤던 영화가 있다. 개리 위닉(Gary Winik) 감독의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13 Going on 30), 2004>이다.

외국영화 제목의 뛰어난 번역들도 많지만,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어딘지 어색하다. 너무 긴 제목인 데다, 번역한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그녀가 완벽하다는 것도, 딱 한 가지가 없다는 것도 다 번역한 사람의 의견인 것 같아 살짝 거북스럽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제목부터 스포일러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라리 원제인 <13 고잉 온 30>에서, '열세 살에서 서른 살로 가다니 뭘까?' 더 궁금해진다.


1987년, 제나(제니퍼 가너)의 열세 살 생일파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나가 다니는 학교엔 'Six chicks'라는 인싸 그룹이 있다. 제나는 늘 그 그룹의 멤버가 되는 꿈을 꾼다. 제나의 옆집에 사는 맷(마크 러팔로)은 그런 제나를 걱정하는 지고지순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그녀의 베프다. Six chicks 멤버들은 자신들의 학교 과제를 제나에게 떠넘기기 위해 생일파티에 참석한다.

맷은 직접 만든 핑크 미니어처 집을 제나에게 선물하고 마법의 가루라며 집 지붕에 반짝이가루를 뿌려준다.


사진 teenvogue.com


Six chicks 멤버들은 게임인 척 속여 제나를 벽장에 들어가게 한 다음, 그녀가 대신해 놓은 과제만 가로채 사라진다. 이를 알게 된 제나는 모욕감에 울먹이며 서른 살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언젠가 잡지에서 본 멋진 커리어우먼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자 선반 위에 올려놨던 핑크 하우스에서 마법의 가루가 제나를 향해 떨어진다.

다음날 낯선 아파트에서 눈을 뜬 제나는 하룻밤 사이 별안간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한다. 게다가,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잡지사의 에디터가 돼 있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는 Six chicks의 리더였던 루시(주디 그리어)라는 걸 알고, 맷을 찾아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17년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생일파티 후 Six chicks의 새 리더가 된 제나는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학교 생활을 했고, 그러는 사이 맷과는 연락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사진 yns.com


믿기지 않았지만 자신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제나, 성인으로서의 멋진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가족과 멀어지고, 동료의 남편과 몰래 만나는 등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살아왔음을 알게 되자 몹시 실망한다.

제나는 부모님과 화해하고, 포토그래퍼인 맷에게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에 쓸 사진을 부탁한다. 함께 일하며 둘은 사랑을 느끼지만, 이미 맷에겐 제나와 연락하지 않던 사이 만난 약혼녀 웬디가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은 큰 성공을 거두나, 루시의 배신과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왔던 잘못으로 인해 제나는 맷과 함께 만든 작품들을 경쟁사에 빼앗기게 된다.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돌아온 제나. 맷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맷은 웬디와 결혼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맷이 간직하고 있던 핑크 하우스를 들고 나와 힘없이 집 앞에 앉는 제나를,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결에 마법의 가루가 감싸기 시작한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열세 살의 생일파티, 제나는 한번 더 주어진 기회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맷과 제나가 결혼식을 올리고 핑크 하우스와 꼭 닮은 분홍색 집에서 행복한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 친근한 '80년대 팝송이 흐르던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제나가 회사 파티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맷과 함께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Thriller)' 라인댄스를 추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이처럼 '80년대의 향수와 더불어 누구의 가슴속에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학창 시절의 부드러운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한 편의 동화 같은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영화. 그러나 메시지는 묵직했다.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사진 buzzfeed.com


만약 열세 살에서 서른 살로 건너뛴다면, 십 대 중반부터 이십 대에 걸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많은 부분은 나의 기억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나의 기억이다. 제나는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고 눈앞에 펼쳐진 자신의 삶을 납득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의 분홍빛 신혼집엔 그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담은 사진들이 놓여있다. 제나가 기억하지 못하던 공허한 졸업앨범의 사진들과 대조되는 장면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평생에 걸친 테제다.


그리웠던 집에서 엄마표 아침밥을 먹으며 제나와 엄마가 나누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제나: 엄마에게 뭐든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게 뭐였음 좋겠어요?
엄마: 아무것도.
제나: 엄마 인생을 바꿀만한 굉장히 큰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어요?
엄마: 많지.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왜냐면, 그런 실수들을 하지 않았다면 잘못된 걸 바로잡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


서른 살 제나는 겉으로는 모든 걸 다 가진 듯 화려해 보이지만 늘 그립고 허전했다. 자신도 모르게 맷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마법의 가루로 건너뛴 서른 살, 다시 돌아와 맷과의 추억을 쌓으며 살게 된 서른 살, 두 번 다 그녀는 맷을 사랑했다. 맨해튼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보다, 맷과 사랑으로 채우게 될 핑크 하우스에서 제나는 훨씬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뭘까.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에 신경 쓰느라 내 마음을 외면하고 있진 않은지, 소중한 학창 시절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혹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랑을 몰라보고 너무 멀리서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볼 때다.


사진 geekfe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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