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심은 우리를 괴롭히고 서로의 관계를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한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가족, 친구, 동료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때로 위선자가 되기도 한다. "축하해"하는 얼굴과 "불공평해"하는 마음이 공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의 약점을 공략해 자신도 모르게 그를 깎아내리는 데 몰두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붙박이 된 듯 발전 없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고, 또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는, 어찌 보면 평등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왜 각기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누구는 돈 많고 능력 있고 권력을 움켜쥐고 사는데, 왜 누구는 끼니를 걱정하고 병들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데 그가 만든 세상은 왜 이럴까.
누군가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사람들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나름 분석하려 한다. 만약 그날 그때 거기 안 갔다면, 혹은 만약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그 일을 안 만나지 않았을까 하고 가정해 보기도 한다.
누군가 커다란 행운을 얻으면, 원래 금수저라느니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느니 결혼을 잘했다느니 하고 그 행운의 근거를 판단한다.
우리는 이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사건을 접하면 그 원인을 분석하려 한다. 그래야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일에 대비할 수 있거나, 또는 목표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면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일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불안한 일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접할 때,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도 파헤치고 싶어 한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를 오래 느끼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고 다 안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정체는 우리의 지적 능력 저 너머에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될 수 있다면 어떨까. 선과 악이 수학공식 같은 것이어서, 동화 속에서처럼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상을 받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하나님이 마치 크리스마스에 착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주러 오는 산타클로스 같다면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내 삶의 영역, 조건,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삶의 매 순간을 선택한다.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조각씩 나누어 갖고서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 다름에 가치와 평가와 원인 분석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다를 뿐이다.
옆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와 자신을 비교하고 절망하다 질투하고, 결국 그를 공격하는 지경까지 이른다면 그 과정에서 멘털이 붕괴되는 건 자기 자신이다.
비교는 비극의 시작이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 하나하나가 다 귀하다.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는 짧게는 발전의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길게는 자신을 갉아먹는 해충을 내면에 데리고 사는 것과 같다.
내 옆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고 그가 잘 되면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옆에 있음에 감사하면 좋겠다.
그가 이룬 성과를 무시하거나 빼앗을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낸 결과에 감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피곤한 마음을 그만 내려놓고 편해지면 좋겠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대가인 영생을 사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