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서울에서 부모님이랑 같이 밥을 먹다가 "... 난 물욕이 없는 편인가 봐" 했더니 아버지, "나 닮아 그런다" 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아빠는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분이 아니었다. 나 역시 경우에 따라 부족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넘치는 부유함보다는 지금 가진 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저 먼 땅이나 은행계좌에 엄청난 돈이 들어있다 해도 어차피 매일매일 그걸 실감하며 살진 못할 테니까.
그런데 물욕이 없는 편이라 해서 소유욕까지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뭔가를 갖고 있고 싶은 마음, 꼭 쥐고 놓지 않고 싶은 마음, 누군가 내게서 달아날까 봐 두려운 마음은 늘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추운 겨울날 이불속에서 묻힌 따뜻함마저 내 몸에 오래오래 달고 있고 싶었으니까. 문득,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뭘까 궁금해진다.
세상에 태어나 최초의 인간관계를 맺은 부모님은 알고 보니 나만의 부모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보다 늦게 태어난 동생의 부모님도 됐다가, 다른 가족들로부터 '애비, 에미, 형님, 누님' 같은 낯선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마음을 나누고 빛나는 순간을 함께한 친구도 나만의 사람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만난 가족인 남편과 아이들도 엄밀히 말해 나의 소유는 아니다. 모두 독립된 인격체이고 나와 다른 존재들일뿐, 내가 그들을 가질 수는 없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애지중지 아끼고 살펴도 결국 해지거나 낡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 의미가 쇠퇴했을 땐 내 손으로 버리기도 했다.
좋아하는 음식도 그렇다. 내 몸에 집어넣는다고 내 것이 될까. 내가 먹은 것들은 소화라는 화학적 과정을 거쳐 배설된다. 변화된 형태로 내 몸의 일부는 될 수 있지만 온전히 내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내가 습득한 지식이나 깨닫게 된 세상의 이치 등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며 내가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그 착각을 움켜쥐는 순간 오히려 아집과 독선의 노예가 되어, 깨달아갈수록 자유로워지기는커녕 더욱 내 안에 갇히고 말 것이다.
형체가 있는 것이든, 관념 안에 존재하는 무형의 것이든, 이 세상에서 오롯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듯하다. 영원한 존재는 없기에, 그리고 나조차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기에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소유의 실패담을 늘어놓고 있자니, 힘들게 태어난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살짝 억울하다. 어떻게 살다 가면 잘 살았다 소문나는 걸까.
가질 수 있는 게 없다면 차라리 지금 나한테 있는 걸 나누며 거기서 기쁨을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됐을 때의 느낌,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은 이상하게 쓴 자리에서 자꾸 다시 솟아나곤 한다. 그리고 나의 삶 역시 보살피게 만든다.
나누기, 퍼주기, 사랑하기 ⎯ 유한의 존재인 내게 숨겨진 무한성이 아닐까. 어쩌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나란 존재, 그 삶의 비밀이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하찮은 삶은 없으며 우리 모두가 각자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넓히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사랑을 나누면 그 기억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닐까.
It's amazing. The love inside, you take it with you.
신기한 일이야. 마음속 사랑은 간직할 수 있으니까.
⎯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