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뜨는 별 Autumnstar 7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둘이었다. 하나는 아들 시훈, 다른 하나는 막냇동생 정순이었다.
엄마보다 딱 열 살 어린 정순을 맏딸인 엄마는 동생들 중에서 가장 아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나서 얼마동안 정순을 한 집에 데리고 있었다고도 하고, 그래선지 시연이 어릴 때부터 정순은 시연의 집을 제 집 드나들 듯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시연의 동네에 미술학원을 열자, 정순은 자신의 집에서 자는 날보다 시연의 집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아졌다. 시연도 시훈과 함께 정순의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정순은 학원에서 시연과 시훈을 다르게 대했다. 시훈에게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이것저것 가르쳐주면서도 시연에게는 마치 너 왜 여깄니 하듯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정순이 시연의 존재를 아는 척할 때도 있었는데, 시연의 그림을 놀리거나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말할 때였다. 시연이 견디다 못해 엄마에게 모든 걸 말하며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하자 엄마는 학원 가기 싫은 핑계를 이런 식으로 댄다, 고자질하면 못쓴다, 오히려 시연을 다그쳤다. 엄마가 어쩌면 이토록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지, 시연은 답답하다 못해 온몸의 맥이 풀리는 듯했다.
시연은 다시는 정순의 미술학원에 가지 않았지만, 그 후 미술에는 자신감도 관심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어른이 돼서도 왠지 두려워 그림 그리기와 담을 쌓고 지냈다.
시연보다 열네 살 많은 정순은 시연의 눈에 멋지고 세련된 우상이었다. 그러나 정순은 조카인 시연을 다정하게 대하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까칠하고 예민한 정순은 엄마와 시훈에게는 유독 다정하게 굴었다. 시연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시훈, 정순과 함께 있을 때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이모가 나만 미워해"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는 별소리 다 들어보겠다는 듯 "이모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네가 못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고 말했다.
정순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땐 시연을 그렁저렁 대하다가도 둘만 남게 되면 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곤 했다. 엄마가 시연을 낳자마자 윗목으로 밀어놓고 젖도 물리지 않았다는 둥, 자신이 유학하던 시절에 엄마가 시연을 아빠에게 맡긴 채 시훈만 데리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려했다는 둥, 정순은 시연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시연은 정순이 자신에게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봐온 어린 조카를 질투하고 밀어내려 했던 정순의 심리가 어딘지 모르게 외가의 분위기와 맞물리는 것 같다고, 시연은 생각했다.
엄마는 집안의 거의 모든 일을 정순과 상의해서 결정했고 정순의 말이라면 뭐든 그대로 했다. 정순은 자신이 시연의 집에서 딸 역할을 다 해주고 있다며 생색을 냈다. 시연의 소외감은 날로 더해 갔지만, 엄마의 정순에 대한 무한 신뢰는 변할 줄 몰랐다.
시연의 기억 속엔 엄마가 자신과 정순을 마치 자매처럼 취급한 순간들이 많았다. 엄마는 외가에서 정순이 입던 옷을 가져다 시연에게 입히기도 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던 사춘기에 시연은 늘 이모 정순의 옷을 입어야 했고, 친구들처럼 엄마와 쇼핑하는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다.
시연이 중학생이 될 무렵 정순은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동생을 떠나보내고 엄마는 며칠을 울며 그리워했다. 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의 딸은 자신이 아니라 정순인 것 같다고 느꼈다. 엄마는 몇 달에 한 번씩 건어물이며 반찬 등을 바리바리 챙겨 정순에게 소포로 부쳤고, 방학 때 정순이 서울에 나오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정순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파리에서 유학하는 동생이라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엄마와 정순의 유대관계는 시연의 눈에 너무나 돈독했고, 그것은 시연이 엄마와 이루기를 꿈꿨던 관계이기도 했다.
시연이 중학생이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일이 좀 있으니 외가에 가 있으라고 엄마가 시연에게 말했다. 마침 시험 기간이기도 했으므로 시연은 외가에서 공부하며 며칠을 지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후, 시연은 우연히 거실 테이블에서 못 보던 사진들을 발견했다. 누군가 금방 사진관에서 찾아온 듯 투명한 봉투에 담겨있던 사진에는 아빠, 엄마, 시훈, 정순이 함께 찍혀 있었다. 사진 속 그들은 여행지에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가본 적 없는 하얀 눈 덮인 산, 조그만 기차역 등이 시연의 눈물에 가려 점점 흐려졌다.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만 빼놓을 수 있냐고 시연은 엄마에게 따졌다. 학생에게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냐, 널 위해 그런 건데 뭐 그런 걸 갖고 난리냐, 엄마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다.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이미 난 충분히 밀려난 기분으로 사는데, 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리만치 이 일은 시연의 가슴을 움켜쥐고 오래도록 놔주지 않았다.
정순이 유학간지 십여 년 만에 남편과 함께 귀국했을 때, 시연은 더 이상 속상하기 싫어 자포자기하듯 엄마에게 말해주었다. "자매가 같이 늙어가며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복이겠지. 하긴, 엄마는 나를 알기 훨씬 전에 이모를 먼저 알았으니 나보다 이모랑 더 친한 게 당연할지도 몰라. 둘이 계속 잘 지내길 바랄게."
그 후 시연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고 얼마 안 돼,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엄마와 정순은 무슨 이유에선지 연락을 끊고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