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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ug 22. 2024

이별

혼자 뜨는 별 Autumnstar 9

엄마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족 누구 하고도 연락할 수 없었다. 아빠나 시훈과 가끔 통화를 해도 연락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외가 식구나 사촌들의 말도 늘 자신이 중간에서 전했고, 시연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두 알아야 했다. 누구는 만나도 되고 누구는 만나면 안 된다는 식의 간섭을 하기도 했다. 아빠와의 소통도 엄마를 통할 때가 많았다. 친구관계를 제외한 시연의 거의 모든 인간관계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시연이 나라밖에 살게 되면서 엄마는 시연의 인간관계에 더욱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아빠나 시훈, 시훈의 처인 혜원의 말을 자신이 시연에게 전했으며, 시연이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자신을 통하라고 했다. 시연이 누군가와 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반면, 엄마가 전하는 말에는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섞였으며 엄마 마음대로 삭제하고 전하지 않는 말들도 있었다. 시연과 가족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나 불신으로 번져갔다. 엄마는 마치 주위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 그들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언제나 코너로 몰리는 건 멀리 사는 시연이었다.


부모님이 시연의 집을 다녀가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다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아빠는 시연을 다그쳤다. "엄마가 그러는데, 너..."로 시작된 아빠의 말은, 엄마나 시훈이 전화를 해도 시연이 잘 받지 않거나 연락도 자주 안 할뿐더러, 시연이 시훈의 험담을 엄마에게 늘어놓는다는 것이었다.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 없이 왜 일방적으로 자신만 야단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시연은 전처럼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시연의 대꾸가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는지, 아빠는 잠시 침묵하더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멀고 먼 서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시연은 알 수 없었다. 엄마한테 물어봤자 사실대로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연의 마음 깊은 곳에 묻혀있던 어릴 때의 억울한 기억들까지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어둠 속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왜 태어났을까, 시연은 지옥에 떨어지듯 잠에 빠졌고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곤 했다. 그러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동준에게 털어놓았다. 다만 한 마디라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다시는 엄마 아빠를 보고 싶지 않다는 시연의 울음 섞인 말에 동준은 그래도 어쩌겠냐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마음을 잘 추슬러보라고 했다.

몇 주가 흐른 후 시연은 국제우편 하나를 받았다. 이메일이면 바다 건너까지 단 몇 초만에 편지를 띄우는 세상, 시연은 편지봉투의 촉감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현재가 아닌 먼 과거에서 날아온 편지 같았다. 봉투를 뜯고 하얀 종이를 펼치자 언젠가 본 듯하면서도 낯선 글씨 몇 줄이 보였다. 아빠의 손글씨였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절대 시연을 오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병도 주고 약도 주시는구나,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얼마나 마음에 걸렸으면 손수 편지까지 썼을까,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일순간에 모든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꽉 닫혀있던 창문이 조금 열리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듯했다. 지난번 방문 때 시연의 거절과 항의에 마음이 상한 엄마가 아빠에게 시연을 모함한 게 분명했지만, 시연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무는 추측과 몇 주 동안 겪은 괴로움을 아빠의 편지와 함께 책상서랍 속에 묻어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시연이 서울에 갈 때마다 엄마는 이상한 일들을 벌이곤 했다. 시연의 가족이 서울을 방문하는 날짜를 아빠에게 속이는가 하면, 시훈 등 주위 사람들에게 시연이 지방에 있으므로 만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일 따위였다.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시연을 고립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시연은 알 수 없었다. 따져 물으면, 엄마는 정신이 없어 실수한 거라 말하고 뒤에서는 시연이 엄마인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험담을 했다.

시연은 지쳐갔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엄마의 사랑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잘하면 어려서부터 갈망해 온 엄마의 사랑을 늦게나마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게다가 엄마가 은지에게도 시연의 험담을 하고, 시연 모르게 자신과 연락하며 지내자고 한 걸 알게 됐다. 시연은 엄마로 인해 겪어야 했던 괴로움을 은지까지 겪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딸인 은지에게 엄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은지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고 나서, 시연은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기, 시연은 자기 자신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엄마와의 연락 간격을 조금씩 넓혀갔다. 대신, 다른 가족들과의 연락은 조금씩 늘려갔다. 엄마와 통화를 하거나 만날 때는 꼭 필요한 말만 하면서 감정적으로 부딪치는 걸 피했다.

당신 뜻대로 시연이 움직여주지 않자, 엄마는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굴었다. 걸핏하면 아프다고 전화기를 붙들고 하소연하는가 하면, 모두 잠들었을 새벽 시간에 뜻 모를 긴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시연에게 욕을 퍼붓는가 하면, 어떤 날은 우울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시연은 아빠와 시훈에게 엄마의 몸 상태를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도저도 통하지 않자, 엄마는 그때부터 시연에게 전화도 문자 메시지도 일절 하지 않았다.

엄마의 냉담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연은 알지 못했다. 그보다는, 시연은 그동안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엄마와 차츰 거리를 두면서 시연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픈 과정이었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 다시 피가 흐르고 진물이 고이는 걸 확인하는 것과도 같았다. 엄마의 됨됨이를 알아갈수록, 시연은 '왜 난 그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자기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었다.

시연은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아이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아 보았다. 그리고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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